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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배구 100년의 발자취_
여명
전경성팀 우승의 개가
1939년 제10회 대회에 전경성팀이 출전했다. 전경성팀은 김성태, 김석규, 김호길,
김종억 등 네 김씨 선수가 포함된 철도국팀에 당시 보성전문학교 2년생인 안종호가
특별 편입되어 구성되었다. 5명의 한국인 선수가 주전 멤버였다. 전경성은 남자일반
부 2회전경기에서 가고시마교육을 2-0, 준결승전에서는 도쿄문리대를 2-0으로 연
파하고 결승전에서 간도슈를 역시 2-0으로 완파하며 우승의 개가를 올렸다. 제13회
대회(1942년)에도 경성사범과 철도국이 참가했다. 메이지신궁대회는 일본이 일으킨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에 시달리는 정세 때문에 1943년 제14회 대회로 막을 내렸지만
이 대회는 여러 종목에 걸쳐 일본 땅에 한국인의 우수한 스포츠 기량을 과시할 수 있
는 무대였다. 당시 조선배구협회 회장은 일본인 기타지마(北島)였다.
배구 지도자의 요람, 보성전문
1937년 4월 신학년 초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는 축구, 농구, 럭비 외에 새로 배구
부를 창설했다. 팀 창설에 주동 역할을 한 이들은 한기영, 송현석(선린상업)과, 주석
범(제1고보)을 비롯한 오광섭, 장동은, 박상렬, 김명수, 이상룡 등 제1고보 출신 선수
들이었으며 이에 남장희, 성희수, 안종호가 보강되고 이듬해에는 상급생인 우종의,
김종억, 조동렬, 조창구가 가세함으로써 막강한 전력을 갖추었다.
보성전문의 유일한 라이벌은 경성대(현 서울대) 예과의 일본인 팀이었다. 일본인의
경성고등공업, 경성고등상업(해방 후 서울대에 편입), 그리고 한국인의 세브란스의학
전문은 경쟁 대상이 될 수준이 아니었다.
보성전문은 조선신궁경기대회 전문학교부 결승전에서 늘 경성대 예과와 맞붙어 대
결했다. 1937년 제13회 대회에서 2-1, 1938년 제14회 대회 2-0, 1939년 제15회 대회
2-0 등 3년 연속 상대팀을 제압하고 우승컵을 안았다.
매일 오후 1시부터 6시간씩 훈련으로 쌓은 실력은 일본 성인팀인 철도국, 체신국과
대등한 수준이어서 3강세(强勢)를 이루었다.
보성전문은 1939년 7월 일본 도쿄대(東京大)와 교토대(京都大)가 공동 주최하는 전
일본고등전문학교배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결승 문턱에까지 진출, 일본 배구계를 놀
라게 했다. 15개팀이 출전한 이 대회에서 보성전문은 와세다대학 고등과를 2-0, 후
쿠오카고등상업을 2-0, 오사카외국어를 2-0으로 격파하고 이 대회 우승팀이자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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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치하의
선구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