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배구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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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와 TBC(동양방송)컵 전국중고대회의 탄생을 가져왔다. 이야말로 중고학생 배구
의 붐을 맞은 것이다.
이러한 활기는 6인제 전환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일 청소년 교환경기나 아시
아청소년대회를 여는 저력의 바탕이 되었다. 1965년 9월 18일 처음 열린 제1회 국민
학교대회 때는 22개 팀이 참가했는데 그 수준이 날로 높아져 중학생들과 겨룰만한 수
준이었다. 6인제 경기의 코트규격을 보면 코트 길이 7m, 네트 높이 1m85로 처음 이
코트에 들어서는 어린 선수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조건이었다.
첫 대회 경기결과는 의외의 지방 강세로 나타났다. 충남 문화(남자)와 충남 예산(여
자)은 결승까지 올라가 탈락하고, 춘천 근화(남자)와 부산 동래(여자)가 우승배를 안
았다. 서울 팀들의 몰락은 뜻밖이었다. 이 추세는 TBC컵에서도 계속되어 충남, 전북
이 강세를 지켜갔다.
이러한 학생 팀 증가에 힘입어 1963년 전국선수권대회 때는 참가팀이 사상 최대 규
모인 159개팀에 이르렀다. 이는 광복 이후 국내 배구의 저변을 넓혀가는 대중화, 지
방화에 성공했음을 의미할 뿐더러 그 이후 세계화의 토대를 만드는 저력이 되었다.
여기서 배출된 유망주들이 상당수에 이르렀는데 이에 따라 실업팀도 증가 추세를
보였다. 아시안게임이 있었던 1962년 국내 남자 실업팀으로는 한국전력, 충주비료,
동양방직, 호남비료, 체신부, 서울약품 등이 있었고, 여자팀으로는 조흥은행, 제일은
행, 산업은행이 있어 이들의 3각 대결이 볼만 했다.
남자대표팀의 첫 국제경기
한국 배구 성장기의 강한 도전 정신은 해외 원정 특히 국제대회 출전에서 잘 나타
나고 있다. 축구나 농구와 견주어 후발 종목인 데다 국제무대 진출의 기회가 별로 없
었지만 아시안게임에 이어 올림픽에 진입하는 행운을 잡아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였
던 처지에서 세계 배구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게 되었다.
우리 배구가 처음 세계에 얼굴을 드러낸 것은 1954년 10월 홍콩 원정이었다. 배구
협회가 가장 고심한 경비 문제는 협회 초창기부터 큰 도움을 주곤 했던 장동은 이사
가 사재를 털었고 송인상 부회장도 도와서 마련할 수 있었다. 이 홍콩 원정에서 거둔
4.
임원 사재 털어
첫 해외원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