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배구 100년
102
1943년 10월 17일부터 3일간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제19회 조선신궁경기대회는
총독부가 새로 조직한 조선체육진흥회가 주관했는데 종전의 순수한 스포츠 경기
는 자취를 감추었고 대신 낯선 전투훈련 종목으로 ‘국방경기’가 시행되었다. 남녀
학생선수들을 강제로 동원한 국방경기 종목은 여자부의 수류탄 던지기, 줄다리기,
무도(武道), 씨름, 연합체조, 남자부의 집단 총검도, 연합체조, 활공훈련, 전문대
학부의 기갑자동차훈련, 마상(馬上)훈련, 해양 및 활공훈련 등이었다. 이처럼 서
양 문명의 산물인 스포츠 경기는 전쟁의 희생물이 되어 이 땅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일본은 히로시마, 나가사키 두 도시에 투하된 원자폭탄을 맞고 1945년 8월 15일 미
국과 연합국 앞에 무조건 항복의 백기를 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종식되고 세계는
평화를 회복하였으며, 한국은 광복의 감격을 안았다. 스포츠도 부활의 출발선에 다시
서게 되었고 선수들은 그들 가슴에 태극 마크를 부착했다.
박계조와 안종호
배구의 경우 제1, 2고보, 선린상업, 용산중, 경성사범팀이 배출한 선수들이 보성전
문, 철도국 체신국의 주전멤버가 되었다. 이들 가운데 특히 박계조, 안종호의 얼굴이
돋보였다. 두 사람은 제1고보 입학 동기(1930년)이고, 철도국팀 입단(1935년)도 함께
였다. 1937년 철도국의 조선신궁경기대회 우승과 메이지신궁경기 출전도 이들의 힘
이 보태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박계조는 강화도 우체국장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배구에
천재적 소질이 있어 일본인 교사 스기하라의 제자가 되었으나 아버지의 심한 반대로
곤욕을 치루며 선수로 성장했다. 철도국 선수 시절 일본 와세다대학팀이 두차례 내
한해 순회경기(1935년, 1936년)를 가졌는데, 그때 와세다팀 감독의 눈에 들었고 이
듬해 메이지신궁경기에서 다시 그의 기량이 확인되어 1938년 와세다팀이 그를 스카
우트했다. 박계조는 대학 재학시절인 1940년 일본 대표선수 베스트 12에 선정된 명
선수이다.
제1고보 시절 그는 어렵게 패스된 볼을 고의로 네트에 처넣어 그 반동으로 천천히
되돌아 나오는 볼을 낮은 자세로 자유로이 공격자에게 토스해 주는 플레이가 능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55년 38세의 젊은 나이로 고인이 되었고, 한국 9인제 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