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배구100년 - page 110

한국배구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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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스코어보다 일본의 슬라이드 서브가 우리 선수들을 골탕 먹였다. 일본 배구를
잘 파악하고 있는 박계조는 당초 코치로 내정되어 있었으나 출발에 앞서 갑작스런 죽
음을 맞아 김명수로 교체되었다.
이 선수권대회 9인제경기에서 우리팀은 일본에 2연패한 뒤를 이어 대만과도 1승1
패라는 실망스러운 결과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신생 한국 배구는 훗날의 도약을 꿈꾸
고 있기에 어떠한 수모도 감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실험은 첫 해외 노크 이후 4년 동안 계속되었다. 6·25전란의 포성이 멎은
뒤 체육계도 틀이 잡히기 시작, 아시안게임, 올림픽 대비에 총력을 기울일 때였다. 아
시안게임에 처음 우리 배구가 참가한 것이 1958년 5월 도쿄에서 열린 제3회 아시안
게임이었다.
이 대회에서는 6인제와 9인제 두 종목이 있었으나 9인제만 참가했다. 훗날 도쿄 올
림픽이 그러했듯이 아시안게임에서도 재일동포들의 사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는 점을 고려, 6인제 출전을 포기한 것이다.
그 결과 9인제의 우리 성적은 참가 5개국 중 3승1패로 일본에 이어 2위. 중국에
3-0으로 완승했지만 홍콩과 필리핀에 3-2로 신승했다. 성적보다 중요한 것은 6인제
연구에 전력을 기울여, 선우양국 이사가 6인제 게임 분석은 물론 각종 강습회를 뛰어
다니며 연구 끝에 새로운 기술개발의 밑그림을 마련한 사실이다. 선우양국은 기회 있
1969년 서울에서 열린 제3회 아시아
청소년대회 개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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