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배구100년 - page 100

한국배구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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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최강인 고베고등상업과 준결승전에서 접전 끝에 1-2로 분패했다.
이 대회 출전 멤버인 안종호, 오광섭, 김명수, 장동은, 구연묵은 훗날 배구협회 운
영에 임원으로 직접 참여하거나 우리나라 배구계의 최고 지도자로 활약해 후배 육성
에 힘을 쏟았다. 성희수, 안종해, 신경수, 조동렬도 직장팀 지도자로 팀 육성에 헌신
했다. 보성전문은 1940년 메이지신궁대회 본선 출전권도 획득했으나, 일본인의 조선
배구협회가 경성사범 OB팀과 재경기할 것을 강요하자 이에 불응하고 출전을 포기한
일도 있었다.
일제 지배 말기의 스포츠 환경
스포츠 전 종목에 걸쳐 한국인들의 기량과 경기력이 일본인 수준을 추격하고 그 열
기가 지방으로 확산되어 가자 조선총독부는 그 추세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특히 평양 축구대회 개최권 박탈을 둘러싼 관서체육회와의 충돌은 총독부 당국자들로
하여금 일본인 배격 소요와 항일(抗日)운동 사태 발생을 우려케 했다. 이 땅의 일제(日
帝) 식민통치를 총괄하는 조선총독부는 스포츠에 대한 통제권 강화 조치로 1933년 2
월 9일 그들 일본인의 조선체육협회 회칙을 강제로 개정시켜 사무국을 총독부 학무국
내로 옮기게 하고, 협회 회장직도 학무국장이 직접 겸직케 했다. 모든 전문 경기단체
와각도(道) 지방체육단체는당국의지침을따르도록그운영을묶어버렸다.
초기 배구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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