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배구100년 - page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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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배구 100년의 발자취_
여명
연맹은 그를 추모해 해마다 박계조컵 대회를 개최해 오고 있다.
안종호는 1938년 철도국에서 보성전문으로 옮겨 선수생활을 계속했다. 메이지
신궁대회에서는 승승장구해 결승전에서 간도슈팀을 2-0으로 완파했다. 이듬해
안종호는 보성전문과 전경성군의 주전 선수로 발탁되어 전일본고등·전문학교선
수권대회(7월, 교토 京都), 전일본선수권대회(8월 오사카 고시엔 大阪 甲子園), 메
이지신궁경기대회(10월·도쿄) 등 권위 있는 3개 대회에 모두 참가하는 행운을 누
리기도 했다.
안종호는 제1고보 3년생 시절 이미 조선신궁대회 저학년(2·3학년생) 경기에 팀 주
장으로 참가해 거포(巨砲)의 공격력을 과시했다.
그는 한국인으로서 심판을 맡아본 경험도 가지고 있다. 일제 말기 1941년 경성운동
장에서 열린 조선신궁대회 남자 중등부 준결승전 두 게임의 주심을 봤다. 우연히도
두 게임 모두 일본인 학교와 한국인 학교, 즉 경성사범-평양사범, 평양1중-동래고보
대전이었는데 경성사범과 평양1중이 함께 한국인 학교팀에 패배하자 일본인 심판까
지 가세한 항의소동이 발생했다. 안종호는 실력차에서 승패가 이루어졌음을 강조하
며 오심, 편파 판정 운운하는 항의를 일축하고는 볼을 운동장 한 가운데로 냅다 차버
리고 퇴장했다.
국내 배구의 선구자 박계조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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