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배구 100년
94
가, 경성사범이 전년에 이어 우승했다. 이 대회는 1930년 경성사범이 3년 연속
우승한 가운데 아쉽게도 3회로 소멸했다. 농구경기에 치중하기로 방침이 바뀐 탓
이다.
YMCA팀은 한국 선수로만 구성되었는데 이일영, 엄흥섭, 고인원, 전성진, 이혜택,
이혜봉, 장동욱, 김진수, 정복경 등의 이름이 올라있고, 경성사범에도 이성칠, 김은
재, 김인수, 하달재가 일본인 선수와 함께 뛰었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열린 각종 종합경기대회는 배구를 정식 경기종목으로 채택
하게 된다. 초기에는 일본인 학생 위주였지만, 점차 한국인 학교팀의 참가가 늘어났
다. 특히 조선신궁경기대회가 개최 연륜을 쌓아가면서 한국인 선수들의 기량도 일취
월장 향상되고 일본세(日本勢)를 압도하게 되었다.
배구가 정식 경기종목으로 채택된 주요 체육대회는 조선신궁경기대회, 전조선여자
올림픽대회, 전조선배구농구선수권대회, 평양의 관서체육대회, 일본 메이지신궁경기
대회의 본대회와 조선 예선대회 등이다. 이들 대회를 통해 우리 배구는 발전하여 오
늘에 이르고 있다. 배구만의 단독 경기대회는 거의 개최되지 않았다.
<조선신궁경기대회>
조선총독부의 후원 아래 일본인의 조선체육협회가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개최한
종합경기대회이다. 1925년 경성운동장이 준공된 것을 계기로 그 해 가을에 조선신궁
경기대회가 창설되고 오늘날의 전국체육대회처럼 육상, 축구, 야구, 배구, 농구, 정구
등 7개 종목 경기가 함께 거행된 종합체육대회였다. 일본 천황(天皇)의 개국조(開國
祖)를 모시는 일종의 종교적 체육행사였다.
경성운동장은 서울 성동 원두에 이들 여러 종목을 동시에 진행할 수 있는 경기 시
설로 경성부(京城府
·
현 서울시청)가 공사비 일화 25만 엔을 들여 완공했다.
제3회 대회 때부터 한국인 선수들도 참가하게 되었고, 시범경기 종목이던 배구도
정식종목으로 지정되었다. 2년이 지난 1929년 일본인 교사 스기하라가 지도하는 제1
고보팀이 경성사범, 용산중, 선린상업 등 일본인 학생팀이 휩쓸던 배구 경기에 참가
하면서 이들과 대전해 대등한 실력을 발휘했다.
조영규, 이일영 등이 주전인 제1고보는 평소에 송인상, 김익배 등 한국 학생이 포함
된 선린상업과 자주 연습경기를 가져 기량을 닦았고, 1929년 제5회 대회부터 193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