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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배구 100년의 발자취_
여명
선여자정구, 전조선중등육상, 전조선축구대회를 개최하는 등 체육계가 활기를 띠게 되
었다. 이에 맞추어 한국인의 각 경기종목 단체가 속속 조직되기 시작했으며, 여기에는
민족의 지도자급 인사와 동아일보 이길용(李吉用) 기자 등 신문사 간부들이 적극 참여
했다.
배구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초창기에 선수 양성과 팀 구성이 지지부진하고 활기를
띠지 못한 이유는 게임 중 선수 간에 신체적 접촉이 없고 과격하지 않아 여성에게 알
맞은 스포츠로만 인식되는 등 레크리에이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저 넘어온 볼을 받아 올려 상대쪽에 넘기는 수준이고, 서브 역시 게임을 하기 위해(in
play) 서빙하는 꼴이고, 어지간한 홀딩은 반칙으로 판정하지도 않았다. 여자들은 팔,
허벅지를 외부에 들어낼 수 없어 블루머(발목 부분을 묶은 바지) 같은 유니폼을 입어
플레이하기가 불편했다.
배구를 가르치고 팀을 보급할 지도자도 거의 없었다. YMCA의 바이런 P. 반하트
역시 농구 지도에 치중해 YMCA 농구팀의 일본 원정에 코치로, YMCA 체육교사인
김영구는 선수로 참가했다. 김영구는 1931년부터 농구협회 임원으로 평생 활약했다.
YMCA 배구팀 선수인 전성진은 농구, 이혜택은 축구, 이혜봉은 아이스하키, 엄흥섭
은 스키
·
등산을 그들의 전문 종목으로 택해 이 후에 지도자가 되었다.
활발한 강습회와 학교 배구 붐
배구 경기의 보급과 확장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지도자 양성이 시급했다. 당시
중등학교급 교육기관인 태화여자관(泰和女子館)은 1925년 4월 새 학기를 맞아 학
교 안에 운동부를 신설하고 학생과 교사들을 참여시켰다. YMCA 체육교사 김영구
를 초청해 매주 목요일과 토요일 배구와 농구 경기를 지도케 했다. 김영구는 7월 방
학기간에 열리는 YMCA 주최 운동무용회에서도 일반 성인 여성들을 상대로 배구를
가르쳐 보급에 힘썼다.
한편, 일본인 단체들도 본국의 유명한 지도자들을 초청해 배구 강습회를 가졌다.
조선신문사(일본인 경영)는 1926년 3월 25일부터 4일간 일본 나라(奈良)시 고죠(五
條)중학교 미키 류우료(三枝裕龍) 교사를 초청해 강습회를 여는 한편 전조선배구농구
선수권대회와 여자올림픽대회를 해마다 개최해 배구 보급에 힘을 보탰다.
일본인들의 경성YMCA(중구 태평로 소재)도 1927년 3월 16일부터 4일간 당시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