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한국배구 100년의 발자취_
여명
원산고녀 배구전성시대로 기록된다.
이 무렵부터 우리 여자배구의 경기수준은 일본인과 대등한 수준에 오르고 독자적
인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경성사범연수팀은 1932년부터 선수 전원이 한국인 학생
으로 구성되고 철도국, 체신국 여자팀과 대등한 경기를 벌였다.
조선총독부는 중일(中日)전쟁이 소위 태평양전쟁으로 확전(擴戰)되면서 배구를 포
함한 모든 구기(球技)종목을 적대국에서 고안된 스포츠라는 이유로 금지시키는 한편
‘올림픽’이라는 명칭도 사용하지 못하게 하여 전조선여자올림픽대회는 조선여자종합
체육대회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그나마 1942년에는 유야무야 사라지고 말았다.
<관서체육대회>
평양은 우리나라 제2도시답게 어느 지방보다 스포츠열이 강해 1920년대 초부터 각
종 경기대회가 활기차게 열렸다. 남자는 축구, 여자는 연식정구를 즐길 줄 알아야 젊
은이 구실을 제대로 하는 것으로 인식될 정도였다. 평양YMCA는 이 고장 체육의 중
심이 되어 각종 경기대회를 주최, 주관해 왔다.
최응천(崔應天), 한봉조(韓鳳祚), 이병삼(李炳三) 등이 주동이 되어 1925년 2월 27
일 조직한 관서체육회(회장 鄭世胤)도 YMCA와 별도로 축구, 정구, 야구, 탁구 등 전
국 규모대회를 독자적으로 개최하였는데 대회 규모와 성격이 비슷하여 앞서부터 수
년간 체육행사를 주최해 그 실적을 많이 쌓은 YMCA측과 충돌이 잦았다.
관서체육회는 1931년에 배구, 농구, 육상경기 3종목을 묶어 제1회 관서체육대회
를 열어 연례 체육행사로 확장해 나갔다. 배구가 북방지방으로 보급될 발판이 생겨
난 셈이고, 평양고녀팀은 1935년 제11회 조선신궁경기대회 결승전에까지 진출하기
도 했다.
그러나 관서체육대회는 1935년 제5회 대회를 끝으로 없어졌다. 관서체육회가 축구
대회를 독자적으로 개최하게 되면서 기존의 평양YMCA 대회와 중복되어 두 단체 간
에 참가팀 유치를 둘러싸고 분쟁이 잦아지고 심한 마찰이 일어났다. 총독부 학무당국
은 관서체육회 측의 축구대회를 중지시키려 했다. 관서체육회는 당국의 중지 조치는
스포츠의 자유 발달을 저해하는 것이며 민간단체의 경기대회 개최를 장려할 것을 요
구하고 서울에 항의단을 보내면서까지 강하게 맞섰으나 끝내 좌절된 것이 관서체육
대회 개최 중단의 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