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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배구 100년의 발자취_
성장기
었지만 일본인 학생들이 빠져나간 뒤 공백을 메우지 못한 상태였다. 예컨대 경성사범
이나 경기고녀의 경우 선수 부족으로 투지만만한 지방 팀에 당할 수가 없었다.
1945년 10월 27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광복기념 체육대회는 한국 스포츠의 새 출
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여운형 조선체육회 회장은 개회사에서 “광복과 함께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야 할 무거운 책무가 체육인 여러분에 있다”고 강조하면서 눈물
을 흘렸다. 도열한 선수들도 함께 울었다. 이 당시의 각오와 다짐이 면면히 이어져 배
구를 비롯한 스포츠 강국의 토대를 만든 셈이다.
광복 이듬해의 첫 배구대회 춘계리그에서는 일종의 시범경기라고 할 수 있는 홍백
전이 눈길을 끌었다. 홍군은 보성전문 OB팀으로 안종호, 김종억, 김명수, 안종해, 구
연묵, 성희수, 오광섭, 장동은, 남장희로 편성되고 백군은 한성구락부 팀으로 김익배,
신현수, 임상규, 장덕출, 유승화, 이홍식, 박두진이 포진, 백중의 묘기를 연출했다.
1945년 10월 27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첫 대회 이후 3년 동안의 해방경축 또는 조
선올림픽대회(오늘의 전국체육대회) 배구경기 결승에서 남자부의 전 보성전문이 전
경성을 3-0, 3-1로 두 차례 꺾고 우승했으며, 여자부의 전 이화여전 B팀이 A팀을
2-0으로 이겨 우승했다.
1946년 10월에 열린 조선올림픽대회 겸 제27회 전국체전에서는 경기중, 서울치대,
남선전기, 경기여고, 이화여대가 각부 우승을 차지했다.
이듬해 1947년 10월 조선올림픽대회에서는 동래중, 서울공대, 남선전기, 부산여
중, 경성여의대가 각부 우승을 차지했다.
폭발적으로 늘어난 학교 배구팀
학원 스포츠로서 배구 바람이 불기 시작한 1950년대. 중, 고교 팀의 증가세는 폭발
적이었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배구팀이 서울에서만 80여개팀에 이르고 전국적으
로는 222개팀이나 되었다. 이 가운데 남자대학이 13개팀, 여자대학 3개팀, 남고 52개
팀, 여고 31개팀, 남중 44개팀, 여중 38개팀에 이르렀다. 서울과 지방의 실력차도 줄
어들어 가히 평준화(平準化)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할 만하다. 이러한 바람은 1965년
전국 국민학교대회(당시 호칭) 창설로 이어졌으며 이와 함께 동아일보 후원 국민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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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배구의
활기찬 새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