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한국배구 100년의 발자취_
성장기
5.
6인제
전환시대
을 때마다 6인제가 훨씬 재미있고 우리 선수들에게 유리하다는 주장을 펼쳐 이듬해
1959년 봄부터 국내에서 6, 9인제를 병행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선우양국의 선견지명
우리 배구의 6인제 준비는 세계 조류에 비추어 매우 늦은 편이다. 항상 세계 톱 레
벨의 강국과의 교류를 통해 새 이론과 기술을 연마하는 일본을 통해 6인제를 받아들
이는 정도였다. 이에 비해 소련 등 동구권과 교류가 잦은 북한은 1950년대부터 6인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1958년 제3회 도쿄 아시안게임에서 우리는 미쳐 6인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9인
제경기에만 참가했었다. 이 대회를 앞두고 국제정보통인 선우양국 코치가 6인제조사
연구원을 자청하고 나서 일본 중심의 기술을 연구, 도입하는 일을 도맡았다. 아시안게
임서 돌아온 그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를 키워준 서울치과대학은 물론 중앙여고
등 학원 팀에서 6인제 배구기술 특별지도를 자원해서 나서는 한편으로 1960년대 들어
6인제배구의지도방식에대해일간신문에기고를싣는등의욕적인연구에앞장섰다.
선우양국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은 고집스러울 만큼 포기할 줄 모르는 열정과 새
로운 것에 대한 연구열을 증언해 주었다. 1958년 도쿄 아시안게임에서 그러했듯이 훗
날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때는 개인자격 조사연구원으로 참가, 이곳저곳 돌아다니
며 정보 수집에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시안게임의 경우 1966년 방콕대회에 가서야 6인제만 채택했으며 그 이전에는 6,
9인제 병행실시라는 동거시대가 있었다. 따라서 6인제전환에 따른 기술 개발도 늦어
지는 후진성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국내 대회를 보면 6인제 전환은 전국체전에서 순
조롭게 진행되었다. 1956년 처음으로 전국체전에 6인제를 선보인 이래 지방학교들의
호응이 높아 1964년부터는 9인제를 철폐하고 5인제 경기만 갖기 시작했다.
이러한 발 빠른 변화로 마침내 1959년 10월 6일 대한배구협회는 국제배구연맹에
정식 가입하기에 이른다. 뒤를 이어 1961년 12월 도쿄에서 열린 국제 배구 심판회의
에는 구연묵이 참가하고, 이듬해엔 구연묵, 장경환, 이택근, 이재창이 국제심판 후보
로, 2년 뒤엔 공식 국제심판원으로 공인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