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배구100년 - page 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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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노장인 손영완 등과도 호흡이 척척 잘 맞았다.
지난날 체신-철도의 라이벌 시대도 있었고 군부 쌍벽의 대결도 불만했지만 한전의
경우처럼 주요 종목의 주축 세력을 장악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배구에서는 한전의
기세가 대단하여 어느 팀도 쉽사리 넘볼 수 없었다.
노장 김인수가 선봉에 선 한전은 대한중공업에서 이규소, 김병규, 양인택을 받아들
이고 고려대 재학 중이던 부산고 트리오 서반석(徐潘錫), 박무(朴武), 박상원(朴相元)
을 스카우트하는 데 성공, 당시로서는 아쉬움 없는 호화진용을 갖추었다. 이를 견제
할 대항마라면 장경환(張慶煥) 감독이 이끄는 충주비료 정도였는데 한전의 승률이 높
았다. 1964년 도쿄 올림픽에 출전한 대표선수 가운데 한전 소속이 5명이나 되었다.
이 가운데 김인수와 손영완은 도쿄 올림픽 이후 체력의 한계로 은퇴하고 주전세터
이규소는 장신화 바람에 밀려 이듬해 팀을 떠나면서 한동안 팀이 흔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김영대, 김길태, 김영남, 김영환 등 장신 유망주를 확보함으로써 구연묵 감독
의 장신화 구상은 더욱 빛을 보기 시작했다. 1972년 뮌헨 올림픽 전후의 일이다
한전의 위기라면 구연묵 감독이 보안사를 거쳐 수도경비사 감독으로 자리를 옮김
으로써 판도에 일대변화기 일어난 것이다.
한전에서 시작되었던 ‘장신화 프로젝트’의 중심축은 이제 경비사로 넘어가게 되었
다. 그러나 구연묵의 ‘장신화 실험’은 완성되기도 전에 군팀 간의 지나친 라이벌 의식
에다 일부 선수의 무단 이적 등 부작용이 발생, 미완으로 끝나고 말았다.
광복 이후 반세기에 걸쳐 진행되던 남전-한전시대에 1등공신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구연묵 시대도 저물어갔다. 한때 국내 남자배구의 명지휘자로 정평 나 있던
구연묵은 뒤늦게 중동 진출에 합류, 바레인대표팀을 지도하면서 국제심판으로도 이
름을 남렸으나 1980년대 말 미국에서 병으로 숨져 배구인들을 안타깝게 했다.
목표는 세계 정상
한국 배구가 세계 도전의 기치를 높이 들게 된 것은 불도저처럼 추진력이 강한 이
낙선을 회장으로 만난 행운 덕이다. 그의 회장 재임 시 30여개 경기단체가 있었지만
배구는 언제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멕시코 올림픽이 열리던 해 1968년 국세청장으
로 있던 이낙선은 우리나라가 단체경기에서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종목은 배구뿐이
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배구 주요 활동_
개척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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