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배구100년 - page 430

한국배구 100년
430
이처럼 어수선한 환경에서 만난 사람이 부인 무라이(일본명 이와다 후미코)였다.
이 소식을 들은 동료들과 집안어른의 강력한 만류가 있었으나 한 번 결심한 것을 타
인의 충고로 바꾸지 않는 그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더 큰 충격은 약혼 닷새 만
에 징집영장을 받고 전쟁터로 떠난 것이다.
일본 와세다대학 주장 시절, 이미 ‘동양 제일의 팔’이란 격찬과 함께 고시엔 코트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박계조는 광복을 맞으며 조국이 무엇인지 새롭게 깨달았다.
그리고 민족에 대한 그리움을 느꼈다. 광복을 맞아 부산항에 내렸을 때 그는 조국에
서의 새로운 배구 생활이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광복 이듬해 3월 배구협회를 새로 결성한다는 소문을 들은 그는 이화여고 교편을
잡고 있는 바쁜 틈에도 동료들을 모아 계림구락부를 결성했다. 여기에 동참한 멤버들
이 임상규, 한종석, 장동은, 민병찬 등이다. 박계조는 일찍이 철도와 체신 두 팀을 전
전할 만큼 방랑벽이 있었던 만큼 이때도 어느 날 갑자기 치과대학 코치로 무보수 봉
사하는 등 어느 한 곳에 머물지 못했다.
6·25전란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또 다른 시련에 부딪쳤다. 어떤 사상에
빠져 있던 것도 아니건만 공산체제에 협력했다는 누명에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체신에서 함께 선수생활을 했던 선우양국의 도움으로 박계조는 가족을 진해에 남겨
둔 채 홀로 한강을 건너 상경했다. 해방 전, 그러니까 일본 유학 이전 박계조가 함께
뛰었던남전소속의안종호는그뒤로는내내라이벌이되어싸우는사이가되었다.
이처럼 체신에서의 선수생활은 그의 제2 황금기였으나 이것이 그의 배구 인생의 마
지막이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친일 행적에 대한 차디찬 시선, 6·25전란 와중에 남전의 인민위 조직부장에 임명
제1고보 시절의 박계조.
박계조배 대회에 참석한 무라이 여사
가 이낙선 회장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1...,420,421,422,423,424,425,426,427,428,429 431,432,433,434,435,436,437,438,439,440,...612
Powered by Flipping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