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배구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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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인제의 전도사
우리 배구 발전의 토대를 닦은 성장기 선구자들의 면모를 보면 8·15 광복 이전부
터 역경을 딛고 일어선 의지의 개척 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중심에 제1고보와 보
성전문이라는 큰 산맥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아울러 배구를 통해 나라 잃은 민족
의 슬픔을 표출하면서 젊음을 불태웠던 개척자들의 강한 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 대
표적인 인물이 박계조, 안종호, 이상룡, 김명수, 오광섭 등이다.
이러한 흐름의 다른 한편으로 평양 중심의 오산중학이 키워낸 또 다른 인맥의 간판
으로 선우양국이 떠오른다. 새 스타일의 새 바람을 일으킨 그는 국제 흐름을 살피며
6인제 보급에 앞장선 인물이기도 했다. 국제 감각이나 정보 수집과 학교 배구 지도
의욕에서 먼 훗날 1980년대 비치발리볼 보급에 이르기까지 그의 배구 사랑과 열정은
대단했다.
평양사범 출신으로 독신으로 살면서 해군과 서울치과대학 전성기의 주축멤버였던
그는 개척시대를 열어간 거인(巨人)이었다. 때로는 고집불통의 성격 때문에 심판 판
정 시비의 마찰에 휩쓸리기도 했지만 국제 무대 정보통으로, 또 새로운 국제식(6인
제) 보급에 앞장선 개척자로서의 노력이 단연 돋보였다.
선우양국은 일찍 미국 유학에서 6인제 경기를 익히고 귀국해서는 미군부대에 드나
들며 6인제 경기를 지속적으로 접하게 되었다. 또 국제 배구의 흐름에서 6인제 경기
가 주류임을 깨달아 국내 언론에 6인제 경기의 해설을 연재하는 등 줄곧 6인제 경기
채택의 필요성을 부르짖었다.
선우양국은 광복 이전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선생이 세운 오산중학에 들어가
면서 민족주의 애국관에 심취했으며 평안북도 정주(定州) 일대에서는 소문난 배구 대
장이었다. 무엇보다 주목할 사실은 배구에 대한 애착을 버릴 수 없어 장래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는 평양사범을 중도 자퇴하고 오산중학으로 옮긴 것이다.
거상(巨商)으로 유명했던 남강은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의 강연에 감동하
여 교육에 전념하게 된 사회운동가다. 이러한 남강의 권유를 받아 오산중학 4학년에
보결생으로 들어간 선우양국은 배구 기술 이전에 새로운 입지훈(立志訓)을 익히며 새
로운 도전 길에 들어섰다.
남강의 체육관(觀)은 역시 남다른 면이 있었다. 스포츠는 경기나 게임 그 자체로 끝
나는 것이 아니라 애국혼과 청년 정신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고 믿었던 것이다.
남강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선우양국이지만 편입생에 대한 토박이들의 따돌림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