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배구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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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으면연습이아니다”는강성발언을서슴지않으면서후배들을다그치고호령했다.
그런가하면 평양사범 재직 당시 배운 심판론 그대로 좀처럼 타협할 줄 모르는 원칙
주의를 고수했다. 언제나 심판의 양심, 의사의 도리라는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한
다는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스포츠 외교·행정의 주춧돌
한국 배구가 세계의 문을 노크하기 시작할 무렵 국제외교, 남북문제 등 난제를 풀
어가는 행정의 중심에 오광섭(吳光燮) 당시 대한배구협회 실무부회장이 있었다. 플
레이어로서 명성을 떨친 것은 아니었지만 안종호, 박계조, 김명수, 이상용으로 이어
진 경기(京畿)중학 배구의 맥을 이어간 리더의 한 사람이었다. 특히 8·15 광복 이후
혼란시기 조선배구협회에서 대한배구협회로 새롭게 배구 행정의 기틀을 다지던 무
렵 소장파그룹의 중간보스로 황무지를 헤쳐나간 공로자가 바로 당시 20대의 오광섭
이다.
영어와 일본어에 능통한 외교력과 국제 감각 외에 여러 계보의 지지기반을 구축한
조직력이 돋보여 1950년대 대한배구협회 이사장(오늘날의 전무이사)으로 일했으며,
1964년 민관식 대한체육회장의 절대적인 신임 아래 대한체육회 전무이사를 맡을 만
큼 행정 능력을 인정받았다.
제일고보(경기중학)를 나와 보성전문(고려대)의 전성기를 만드는 가운데 한때는 육
상과 축구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으며 졸업 후 경기중, 서울상대, 고려대, 숙명여대 벤
치를 맡아보는 등 경기 지도자로서 땀 흘린 때도 있었다.
그를 가리켜 후진들은 ‘나라보다 배구를 더 사랑한 배구인의 심벌’이라고 평하며 존
경심을 표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처음 올림픽 무대의 길을 연 개척자였다는 점에서
특히 그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우선 도쿄 올림픽 아시아지역 예선에 나가는 남녀 대표선수단 단장으로 북한과의
의견 충돌 등 미묘한 난제를 풀어 가는데 그의 지혜가 돋보였다. 국제외교 활동, 특히
일본과의 긴밀한 협력 또한 빛났다. 그 결과 마에다 이사장을 비롯한 일본배구협회
친한파 임원들과의 협력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다.
오광섭은 훗날 두 차례나 대한체육회 전무이사를 맡아 어려운 현안을 무리 없이 처
리하는 행정수완을 발휘했다. 그의 가장 두드러진 업적이라면 1964년 도쿄 올림픽
오광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