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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에 텃세와 고령 학생으로서의 고충이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정의감과 의협심이 강했던 선우양국은 배구선수로서의 공헌보다 광복과 함께 닥쳐
온 사회 혼란, 무엇보다 일본의 흔적을 이 땅에서 말소하는 과업과 좌우충돌을 극복
하는 일에 앞장섰다. 당시 그의 꿈은 일본의 무장해제에서 그치지 않고 반공반탁(反
共反託)의 기수였던 이철승의 뒤를 따라 학생운동에 앞장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의욕
이 너무 강했던 탓인지 이런저런 혼란에 휩싸이고 나중엔 이념대립의 후유증에 실망
한 나머지 학도 대장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내가 길 길은 오직 배구뿐’이라고 결론지은 그는 배구 코트에 복귀한 데 이어 조선
대학배구연맹 결성에 앞장서곤 했다. 철학도 출신의 초대 회장 한종석(韓淙錫)의 바
통을 이어받아 학교체육의 일환으로 배구 기술 전파에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선우양국이 그의 우상과도 같은 박계조를 만난 건 광복 직후 체신부에 들어갔을 때
였다. 오산중학 편입학 당시 유급하는 등 실제 나이보다 늦게 졸업한 탓으로 동갑인
박계조에게 늘 ‘선생님’이란 호칭을 붙였다. 첫 만남에서 박계조는 선우양국의 비범함
을 간파하고 “자네는 한국 배구의 중요한 역할을 할 사람이니 몸가짐을 잘 하라”는 당
부를 잊지 않았다. 체격으로 보나 화끈하게 밀어붙이는 열정으로 보나 한국 배구의 대
들보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고무된 선우양국도 ”피를 보지
배구원로들(오른쪽부터 선우양국, 이
상룡, 김종하 전 대한체육회장, 임상규)
배구 주요 활동_
개척시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