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배구100년 - page 436

한국배구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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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전에서 모두 남전에 무릎을 꿇었다.
남전은 1947년 제2회 종별선수권 결승에서 운수부를 3-2로, 1948년 전국체전 결
승에서 체신부를 2-1로 각각 제압하고 우승했다. 1949년에는 전국체전 결승에서 교
통부를 2-0으로, 전국선수권대회 결승에서 체신부를 3-2로 누르고 연승행진을 이어
갔다.
남전엔 배구 코트가 없었다. 서울 북창동 사옥엔 코트가 없어 가까운 체신부 코트
를 빌려 쓰며 함께 훈련했다. 실내코트는 상상도 못할 때인지라 흙바닥 코트라도 시
간이 비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곤 했다.
그러나 안종호, 구연묵을 축으로 한 남전의 전성기는 6·25동란 이후까지 이어져
1951년 종별선수권대회와 전국체전 우승을 독식하고 5년에 걸친 장기집권의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던남전독주가막을내린것은 1952년, 주력선수들이이미연령적으로한계에이
른데다적수가없다는자만심으로안이해져정신적으로도흐트러지기시작한것이다.
이처럼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마흔에 이르도록 코트를 누비던 안종호가 감독직
을 맡으며 사실상 현역에서 물러나고 구연묵도 타고난 재능을 더 살리지 못한 채 선
수생활을 끝내버렸다. 게다가 이상용이 해군에 입대하는 바람에 남전은 별안간 내리
막길에 접어들고 말았다.
1960년 이후. 5·16과 함께 국영기업체 통폐합 방침에 따라 남선전기는 조선전업,
경성전기와 합쳐 한국전력으로 거듭 태어났다. 시련기였다. 한전도 구조조정의 바람
을 피해갈 수 없었다. 한전은 육상을 비롯해 축구, 야구, 배구(남자), 농구(여자) 등 5
대 스포츠를 육성한다는 방침 아래 국가대표 급으로 전열을 재정비하게 되었다.
구연묵에게는 1960년대에 행운이 열렸다. 1962년, 1966년 두 차례 아시안게임의
감독(남자)을 맡아 두 차례 모두 일본에 이어 은메달의 성과를 일구어낸 것이다. 팀
분위기를 추스르고 새로운 파워를 만들어내는 데 그의 부드러운 리더십이 큰 효과를
보았다.
구연묵의 배구 인생은 한전(韓電)에서 다시 시작됐다. 안종호 감독 시대가 끝난 뒤
그 빈자리에 구연묵 코치가 부름을 받은 것이다. 한전은 남전 시대를 뛰어넘을 위력
을 갖췄다. 먼저 그가 공들여 완성한 작품이 육군CIC와 대한중공업을 거쳐 스카우트
된 손영완(孫永完)과 곽동팔(郭東八)이다. 한전의 수호자라고 할 노병 김인수(金仁洙)
가 있어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1957년 한전에 둥지를 튼 김인수는 구연묵 코치는 물
안종호
구연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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