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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대표 팀의 대리출전문제를 슬기롭게 처리한 것이다. 북한의 올림픽 보이콧으로
인한 일본조직위원회의 응급조치의 들러리라는 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리출전 문
제는 당시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핫이슈였다. 더구나 일본조직위측이 여자배구 경기
의 유산을 막기 위해 일본 전세항공기를 보내고 상당액의 사례금도 전했다는 루머가
사태를 더욱 시끄럽게 만들었다.
그가 취한 자세와 결단은 단호하고 냉정했다. 우선 북한의 올림픽 철수로 처음 올
림픽에 채택된 여자배구가 참가국 절대 수(6개국) 미달로 유산되는 불행한 사태를 막
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국제무대의 길을 여는 한국의 입장에서 금전수수, 들러리 출
장의 오해를 씻고 당당하게 남녀동반 출전하는 기회를 포기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이 논란은 당시 한일관계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언론의 집중공격은 물론 정치문제
로 비화될 만큼 시끄러웠지만 그의 소신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배구인들의 의지와 대
한체육회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한국 남자팀은 당당히 지역대표로, 여자팀은 대리초청 케이스로 나란히 도쿄
올림픽에 출전했다. 비록 1승도 못 올리고 최하위의 낭패를 당하고 말았지만 그는 이
일에 대해 후회한 적이 없었다.
국내 배구와 체육회의 행정은 아시아청소년대회를 창설하는 등 스포츠 외교에서도
탁월한 재능을 보이던 그는 1976년 56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남전(南電)의 신화
광복 후 이 땅에 남전 신화시대가 있었다. 6·25동란을 전후로 어느 팀도 남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남전이 확보한 창단 초기의 멤버는 보전 출신인 장동규, 박두진,
이정근, 김종훈, 그리고 뒤에 가담한 성희수 등이다. 이들의 화력은 대단했다. 1947
년 전국체전 결승에서 격돌한 남전과 체신 경기는 중반까지 체신의 우세로 흘러가더
니 안종호, 구연묵 쌍포가 터지면서 전세가 뒤집혀 결국 남전의 2-1 승리로 끝났다.
안종호가 우직할 정도의 본격파라고 한다면 구연묵은 임기응변에 능한 요령파여서
팀 전력에 묘한 하모니를 이루었다.
남전 아성에는 1947년 창단된 조흥은행도 진해의 해군도 스트레이트로 나가 떨어
졌다. 해군은 문관이던 박계조에 의해 만들어진 팀이다. 남전 원년 멤버인 이상용에
이어 박진관 등을 영입하면서 막강 전력을 구축했으나 이해 종별선수권대회와 전국
배구 주요 활동_
개척시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