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배구100년 - page 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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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는 경력 시비에 시달린 데다 배구 코트에서 때로는 코치로, 때로는 선수로 1인
2역, 3역을 감당하느라 자신의 건강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게다가 가족과 떨어져
사는 불안정한 생활로 시름에 빠져 끝내는 알콜 중독에 간질환 선고를 받기에 이르고
만다.
박계조가 한쪽 다리를 절면서 진해를 찾아갔을 때 이미 그의 건강은 걷잡을 수 없
을 만큼 기울어져 있었다. 그는 부인 무라이의 간호를 뿌리치고 다시 상경한다. 숨을
거두기 전에 꿈을 함께 만들어온 배구 동료들의 얼굴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도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며 지방순회 배구 지도자 강습에 나섰고 전주에서
영남 지역으로 이동하는 길에도 심한 천식으로 가쁜 숨을 몰아쉰 끝에 진해에서 잠들
고 말았다. 36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의 지갑 속에는 부인 무라이의 사진 한 장이 들
어있었다.
박계조배 추모대회가 시작된 것은 1962년부터. 첫 해에는 서울운동장 옥외코트에
서 개최되었으나 이듬해부터 장충체육관의 개관에 따라 실내경기로 진행되었으며 특
히 국제 추세에 맞추어 처음부터 6인제경기만 채택함으로써 우리 배구 국제화의 효
시가 된 셈이다.
이 대회가 올림픽 등 세계 대회 파견 선발전을 겸하는 등 권위를 확보함에 따라 실
업팀들이 총 출전하는 비중 있는 대회가 되었으며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박계조 가족
들이 우승배를, 그가 다녔던 와세다대학 후배들이 개인상 트로피를 기증하여 시상하
게 되었다.
불세출의 배구 스타 박계조를 특히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경기중학을 배구명문으
로 만드는 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철도, 체신 등 국내팀들을 궤도에 올려놓은 개척
자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아시아배구선수권대회 때는 우리 대표팀 코치로 기술 지도
와 전술 개발이라는 뛰어난 공적을 남겼다. 건강 악화로 피를 토하면서도 후진 지도
에 헌신하다가 요절했다는 사실 또한 후진들의 심금을 울리게 했다.
고인추모대회 32년째인 1975년 대한배구협회장 이낙선은 개회사에서 이렇게 강조
했다.
“현재는 과거의 소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공기와 태양의 고마움을
모르듯이 우리들은 지난날의 선배들의 공로를 잊기 쉽습니다. 이제 우리는 과거 선배
들보다 몇 곱절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박계조 선배를 단순히 추모할
일이 아니라 제2, 제3의 걸출한 스타를 키워내는 데 모든 힘을 쏟아야 할 때입니다.”
배구 주요 활동_
개척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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