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배구100년 - page 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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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를내주면곧바로강한체력훈련이뒤
따랐다. 말이좋아체력훈련이지얼차려였
다. 블로킹 훈련 때는 손가락에 오자미를
달고 점프했다. 무의식중에 손가락이 아
래로내려가도록하기위해서였다고한다.
그렇게 훈련을 받은 결과 1972년 뮌헨 올
림픽에서 4위, 다시 4년이 지난 1976년 몬
트리올올림픽에서비로소동메달을딸수
있었다.
이즈음 세계 배구를 양분하던 일본
과 소련의 세력다툼이 대단했다. 일본은
1960, 1970년대 ‘힘의 배구’를 구사하던 소련에 기술 배구로 맞서 그들의 전성기를 이
룩했다. 1964년 ‘동양의 마녀’라는 신화를 만든 다이마쓰와 뮌헨 올림픽에서 처음 남
자 챔피언에 오른 마쓰다이라의 공로가 절대적이었다. 이들의 지도방식은 기술 배구
를 추구하는 우리 배구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다이마쓰는 “훈련을 하는 데 쉬운 것은 없다. 어렵고 고통스러워야만 진보가 있고
발전이 있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그는 공격보다도 수비가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하
면서 ‘한국 배구는 수비가 약하기 때문에 경기 운영이 잘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한 무작정 일본, 소련이 하는 대로 한다고 성공하는 것도 아니며 창의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1970년대는 우리 배구가 세계 정상의 꿈을 향해 용맹 정진하던 시기다. 또한 수많
은 인재들이 배출되어 세계로 뻗어나가던 팽창의 시기이기도 하다.
1970년 7월 여자대표팀 코치였던 박무(朴武)가 미국 대학팀 지도를 위해 처음 태평
양을 건넜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우리 여자팀이 5위에 오른 성과를 높이 평가
해 미국 측이 초청한 것이었다. 박무는 지도력을 인정받아 미국 여자대표팀을 지도하
다가 1974년 3월부터는 캐나다 여자대표팀 감독으로 부임, 이후 줄곧 캐나다에서 활
동하게 되었다.
해외로 나간
한국배구
전도사들
한국 배구 발전에 크게 기여한 다이마
쓰 히로부미
배구 주요 활동_
개척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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