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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심판의
발자취
각 클럽의 에이스로 맞붙을 정도가 되었다.
1980년 아시아의 거포로 불리던 대표팀 간판 스타 강만수가 UAE로 진출하면서부
터 마치 봇물 쏟아지듯 국가대표 출신 선수들의 해외진출 러시가 이루어졌다. 컴퓨터
세터 김호철과 주장 이인이 이탈리아로, 윤영내, 이희완, 임해숙, 원영례, 김애희, 엄
익순은 서독으로 날아갔다. 정강섭, 안병만은 중동행을 택했다. 정화숙, 심현숙은 일
본으로 건너갔다. 제1회 세계여자청소년선수권대회 우승의 주역이며 대표팀 에이스
로 활약였던 심순옥은 일본 구라보(倉紡)팀으로, 이탈리아 안코나 클럽으로 동분서주
하며 성가를 더했다.
1962년 첫 배구 국제심판 탄생
- 이재창 국제심판, 국내 첫 공인심판강습회 개최
우리나라 배구 심판의 역사는 일천하다. 국제배구연맹(FIVB) 자체 국제심판 역사
가 일천한 탓이다. 같은 실내종목인 농구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이 됐고 일제 압제 하에서도 상당히 활성화가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1948년에
첫 농구 국제심판이 탄생했다.
하지만 배구는 농구보다 무려 28년이나 늦은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정식종목
이 돼 그만큼 심판 제도 정비도 늦어졌다. 국제배구연맹은 도쿄 올림픽을 2년 앞둔
1962년 도쿄에서 국제배구심판강습회(International Volleyball Referee Candidate
Course)를 처음으로 개최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도쿄 국제심판강습회에 이재창, 구연묵(작고), 장경환(작고), 이택
근(작고), 한종석(작고) 등 5명이 참가해 한종석을 제외한 4명이 합격했다. 농구에 비
해 14년 늦게 국제심판이 탄생한 것이다.
이듬해인 1963년에는 이재창 국제심판 주도로 국내에서 처음으로 배구 공인심
판강습회를 개최했다. 이재창 국제심판은 전국을 순회하며 심판강습회를 열었는데
보통 7~10일 동안 교육을 실시하고 이수한 교육생들에게는 C급 심판 자격을 부여
했다.
순회 강습회를 하면 각 시도에서는 배구를 육성하는 감독, 코치 등 20명 내외가 참
배구 주요 활동_
개척시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