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배구100년 - page 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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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기둥삼아 최강의 전력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 해군종합학교 이성호 교장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전란 속에 피난 생활로 코트를 떠나 있었던 대전공업 출신의 박
진관을 보강함으로써 더욱 탄탄한 전력을 구축했다. 이때 후방 근무인 해군은 지원병
제로, 육군의 일선부대로 가는 것보다 후방 복무를 원하는 사람들로 지원 경쟁자가 많
았다. 그래서 해군본부의 지원시험장 문 밖에는 탈락자들을 태우고 갈 육군 트럭이 줄
지어대기하고있을정도였다. 박진관은배구선수에다글씨를잘써서특채됐다.
연습 벌레로 소문난 박진관은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선우양국의 훈련을 충실히 따랐
다. 어느 새 육군 CIC에 맞설 만큼 자리를 잡았다.
박계조의 지도스타일은 철저한 기술본위와 포메이션에 기초한 팀 플레이강화에 있
었다. 박계조의 지도는 탁월했다. 군인정신도 중요하지만 확실한 전술에 의한 기술
을 갖추지 못한다면 정신력에도 한계가 있다고 믿었다. 선우양국 또한 박계조 스타일
전략에 적극 동조했고 이상룡에 이어 플레이메이커인 박진관이 합세함으로써 공수의
조화를 이룰 수 있어 팀 파워를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게 됐다.
같은 시기 대구에 본부를 둔 육군 CIC는 해군의 전력강화 소식을 들으면서도 태연
자약하기만 했다. “소리만 요란한 그 정도 훈련으로는 어떻게 감히 우리를 따라 오겠
느냐”며 여유만만 했다.
마침내 두 팀이 격돌할 기회가 왔다. 1953년 10월 서울 전국체전. 두 팀은 어렵지
않게 결승에 올라 건곤일척의 승부를 가리게 되었다. 지난 해 병참부대를 누르고 우
승한 CIC는 해군을 가볍게 본 듯 했다. 알려진 선수 몇 명쯤은 간단히 마크할 수 있다
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해군은 박계조의 명예가 걸린 만큼 잘 관리되고 조련된 팀이었다. 이런 해군의 도
전은 CIC에겐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CIC의 다채로운 공격은 해군의 집요한 방어
에 막혀 악전고투, 결국 1세트를 내주고 간신히 2-1로 CIC의 승리로 끝났다.
그런데 이러한 불안한 승리는 1주일 뒤 3군 대항전에서 뜻하지 않은 좌절로 나타났
다. CIC가 해군에 덜미를 잡힌 것이다.
이날따라 이승만 대통령이 부인과 함께 배구코트를 찾아 심판진도 아연 긴장했다.
CIC 부대장 김창룡은 대통령 앞인데도 권총을 찬 채로 코트 주변을 서성였다. 이런
저런 사정을 고려해 균형감과 신뢰도가 높은 오광섭이 주심을 맡았다.
해군 코치 박계조는 벤치에 앉으면서 전투모를 벗었다. 완전 삭발이었다. 그의 얼
굴에는 그만큼 비장감이 엿보였다. 아마도 놀란 것은 선수들이었을 것이다. ‘두 번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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