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배구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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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함으로써 창단 첫 우승의 기쁨을
맛보았다.
호화군단 CIC를 조련한 감독은 김
명수. 일찍이 보전의 일본 원정 때부
터 선수 겸 코치로 뛰었던 김명수는
완벽을 요구하는 두뇌플레이와 임기
응변이 뛰어나다고 소문나 있었는데
CIC에서 또 한 번 빛을 본 셈이다.
한국 배구를 지배한 육군 CIC 전성
시대는 화려했다. 전국체전 3연패,
종별선수권 5승이라는 경기 실적도
그렇지만 대표급 스타들을 다수 배출한 공로 또한 지대했다. 그러나 간판스타들이 노
쇠현상으로 주전멤버가 하나 둘씩 빠져나가면서 쇄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7년여에 걸친 CIC 독주시대의 종말은 비극적이었다. 무엇보다 팀의 창설자이며 정
신적 지주였던 부대장 김창룡이 1959년 저격, 피살당함으로써 팀은 풍비박산되어 버
리고 특무대의 명칭도 방첩부대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CIC 시대의 위풍당당한 기세를 상징한 주축 인물인 장경환은 성신여고에서, 유붕
수는 경기대에서, 박진관은 인창중에서 코치로 활약, 소장 그룹 3인방을 형성하며 경
기력을 높이는데 큰 몫을 했다. 그 이후에는 장경환은 충주비료 감독, 유붕수는 도로
공사 감독, 박진관은 조흥은행에 이어 동일방직 감독을 역임하며 번갈아 대표팀 사령
탑을 맡아 세계진출을 위한 새 교두보를 만드는데도 힘썼다.
해군의 맹위
1952년 휴전에 앞서 CIC가 창설되던 해, 해군에도 배구팀이 생겼다. 진해에 있는
해군 통제부 사령부에 단위별 배구팀이 늘어나면서 부대 대항전으로 확대되어 선수
확보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해군에 이러한 바람은 마침 문관으로 해군에 입대해 있던 박계조 덕분이었다, 박계
조와 함께 제1고보, 보전 시절 키 멤버로 한 솥밥을 먹은 이상룡이 경리장교로, 문관
으로 선우양국도 입대해 있었다.
보안사(오른쪽)와 수경사의 경기는 언
제나 불꽃튀는 열전이었다. 1971년 제
3회 MBC배 실업배구 남자 결승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