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배구100년 - page 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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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것 없이 이른바 ‘군인정신’이 자리 잡고 있다. 한 때 유행하던 “안 되면 되게 하
라”는 구호처럼 CIC의 혼은 마치 실전 전투를 보는 듯했다.
그 선봉이 부대장 김창룡이다. 그의 특별한 관심이 도를 넘으면 배구팀은 공포 분
위기로 바뀌곤 했다. 당시만 해도 CIC의 힘이 군 내부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때였으므로 경기 승패는 물론 선수 스카우트 과정에서도 무리수를
두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여기에 위협을 느끼는 심판들이 CIC 기피 현상을 나타내
기도 했다.
배구가 부대 단합에 긍정적인 효과를 나타내고 우수선수 양성이라는 명분이 확실
한 만큼 휴전 이후 여러 군대 팀이 탄생했다. 해군, 해병대와 헌병감실이 도전장을 냈
으나 역부족, 반짝 성공으로 끝나고 마는 듯 하더니 육군 안에 1928부대와 1079부대
가 등장, 쌍벽을 이루며 각축했다. 한편 피복창 1079부대는 병참의 1060부대와 마찬
가지로 이북에서 내려온 6인제 선수를 규합했으며 헌병사령부는 대구지역 중심으로
구성됐다.
CIC는 우수선수들의 군 입대 상황을 관찰하며 전국의 배구선수 경력자를 면밀히
조사한 뒤, 경기, 경동의 전성기 주력 멤버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이때 바이올린
연주의 특기가 있는 장경환은 육군 군악대에, 유붕수는 미 25사단 CAC 민사처 군속
으로, 송복상은 경남 공비토벌대에, 오만흥은 미 KLO소속 극동사령부에, 김만용은
육군 열차수송대에 그리고 김익삼은 육군 통역장교로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을 한데
모은다면 전국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당시 권력 파워로 볼 때 CIC의 요구를 거절할 만한 부대는 하나도 없었다. 결국 이
들이 대구에 있는 CIC 본부에 집결하는 데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여기에는 서울
의대 출신으로 군의관이었던 윤헌식도 포함되어 있었다. CIC의 욕심은 끝이 없어 한
참 뒤에는 곽동팔과 손영완 두 대표적 장신도 확보했다.
이렇게 뭉쳐진 CIC 전력은 누가 보아도 최강이었다. CIC의 또 다른 강점은 독특한
전략에 있었다. 장경환이 중학시절부터 익혀온 4-3-2 전법을 구사한 것이다.
막강한 CIC의 등장으로 국내배구 판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안종호, 구연묵, 신현
수, 정찬모, 장동규, 이상룡, 이정근 등으로 이루어진 남전시대가 무너진 것도 이때였
다. 1952년 전국종별선수권대회 결승은 신구 두 세력의 충돌로 그야말로 용호상박의
접전이었다. 마지막 제3세트에서 CIC가 뛰어난 체력에도 불구하고 노련한 남전의 페
이스에 말려 16-20으로 몰렸다가 총력수비로 저항, 간신히 22-20으로 대역전에 성
배구 주요 활동_
실업배구
1...,347,348,349,350,351,352,353,354,355,356 358,359,360,361,362,363,364,365,366,367,...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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