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배구100년 - page 344

한국배구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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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호의 진가는 1962년 자카르타 제4회 아시안게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이때
처음 도입된 6인제에서는 한국이 5위로 밀렸지만 9인제에서는 일본에 이어 2위를 차
지했다. 김광호와 손영완 대각선 오픈공격이 주효한 덕분이었다. 특히 레프트 주공격
자리를 지킨 김광호의 밸런스 스매싱은 발군이었으며 블로킹 벽을 뚫는 눈과 타이밍
조절에서 빛났다. 어쨌든 이러한 양포의 위력으로 우리 배구가 새로운 평가를 받는
기회가 되었다.
이해 가을 전국종합선권대회에서는 쌍벽인 김광호와 손영완이 최우수선수상을 공
동수상했으며 대한체육회 최우수선수 표창
에서는 농구의 김영기, 축구의 함흥철과 함
께 김광호가 MVP가 되었다. 쌍벽의 라이벌
인 손영완과 김광호의 경쟁은 1960년대 초
반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김광호는 무릎
부상으로 대표에서 탈락, 1964년 도쿄 올림
픽 출전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가 은퇴하던 해 1965년 충주비료는 호남
비료와의 합병에 들어가 또 한 번 판도변화
의 시련을 겪었다. 다시 말해서 한국전력을
괴롭히던 충비시대는 5년 만에 막을 내리고
호남비료와의 합병에 따른 종합화학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1967년엔 창단 1년차인 봉명광업이 춘계대회 이후 왕좌를 지켰다. 5월 군산에서 열
린 종별선수권대회에서도 우승을 놓치지 않았고 공격의 중심인 박서광은 최우수선
수로 선정됐다. 박서광은 1960년대 초반부터 대표선수로 활약, 1962년 아시안게임,
1964년 도쿄 올림픽, 1966년 방콕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던 스타플레이어였다.
1968년 8월, 봉명광업 배구단은 충북시멘트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듬해인 1969년
박계조배 대회에서 우승컵을 안았다. 예선전에선 3-0으로 패했던 보안사를 결승에
서 물리치고 우승한 충북시멘트 배구단은 사원들의 뜨거운 응원을 받았고 이후 배구
경기장이 애사심과 단결력을 높이는 기능을 하기도 했다. 당시 충북시멘트는 손영완
감독 체제에 진준택, 송경섭, 정약용, 이춘표 등이 활약했다.
1968년엔 10개 팀이 대회에 참가했으나 1969년엔 참가팀이 대폭 줄어 해군, 육군보
안사, 한국전력, 체신부, 충북시멘트의 5개 팀만이 출전했다. 서울전매청, 부산체신청
막 창단한 충주비료 배구단
1...,334,335,336,337,338,339,340,341,342,343 345,346,347,348,349,350,351,352,353,354,...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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