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배구100년 - page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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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배구 100년의 발자취_
희망의 연대
우리보다 우위라는 게 객관적인 평가였다.
그러나 남북 스포츠 대결은 단순한 경기력만으로 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선
첨예한 남북 대립의 정치적 분위기가 그런 우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 선수단은 남북 예선대결에서 패할 경우 아예 서울에 돌아올 엄두도 내지 말라는
암묵적인 압박을 받고 있었다. 더욱 신경 쓰이는 일은 우리 팀이 자유중국과 먼저 경
기를 갖게 되어 북한에 우리의 전력을 고스란히 내보일 수밖에 없게 된 것이었다. 반
면 북한팀에 대해서 우리 쪽이 입수한 정보라고는 고작 일본 배구 관계자들로부터 주
워들은 몇 마디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 즈음 우리 남자배구의 현실은 대표팀을 간신히 구성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대
표팀 훈련이나 전력 향상을 위해 마주 상대할 팀조차 구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올
림픽 예선을 앞두고 대표팀은 실전훈련을 위해 일본, 네덜란드, 서독으로 2개월 반이
나 돌아다녔다. 그래서 꽤 소중한 경기경험을 쌓기도 했지만 선수들은 거의 녹초가
되어 있었다.
상디에 예선 대회에는 약간의 해프닝도 곁들여졌다. 프랑스 정부가 중공의 눈치를
보느라 자유중국(대만)의 자국 내 경기를 불허한다고 막아선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의 입장은 하루 만에 바뀌어 우리 대표팀은 첫 경기서 자유중국을 3-0으로 손쉽
게 물리쳤다.
남북 대결은 양측 모두 초긴장 속에서 진행되었다. 당시 출전 선수들은 그런 차가
1972년 첫 남북대결에서 승리, 올림픽
출전권을 따낸 남자대표팀이 뮌헨 올
림픽 출전에 앞서 네덜란드 헤이그의
이준 열사 묘적지에 참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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