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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기를 벌였다. 산업은행이 먼저 양진수를 빼돌려 선수 유괴사건으로까지 번졌으나
이번에도 동일방직이 승자가 되었다. 1966년에는 한국 최고의 왼손 스파이커 진준택
이 체신부에서 봉명광업으로 옮겨, 선수관리에 적신호를 울렸다. 여고 최고의 스카우
트 파동은 1968년 서울의 여고 최강 팀인 중앙여고와 덕성여고의 부산팀 ‘싹쓸이’였
다. 이 때문에 부산여고와 남성여고, 혜화여고 팀이 깨져버렸다.
중앙은 부산여중의 박인실과 남성여중의 장혜옥을, 덕성은 남성여중의 윤영내, 오
설광을 빼돌렸다. 우수선수들을 한꺼번에 서울팀에 모두 빼앗기자 부산배구협회는
대한배구협회에서 탈퇴하고, 부산의 여고팀은 한동안 사라졌다.
1969년 스카우트의 초점은 제일은행 해체 후, 동료선수들과 같이 선경직물로 가지
않고 국세청 행을 택한 스파이커 김영자와 여고 최장신인 최숙(175cm, 중앙여고)이
었다. 국세청을 가기로 했던 최숙이 신설팀인 도로공사에 가고 싶다며 잠적, 최숙의
부모가 수색원을 내는 등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1960년대 후반 기존의 산업은행, 동일방직에다 석유공사(1966년 1월), 국세청(68년
2월), 도로공사(69년 2월), 선경직물(69년 9월), 호남정유(70년 9월) 등 여자실업팀이
연이어 창단하면서, 경쟁이 치열하게 되자 각 팀들은 유망주 잡기에 혈안이 되었다.
자연히 스카우트 과열 현상이 일어나고 잡음도 많아졌다. 실업배구에선 ‘부익부 빈익
빈’ 현상도 심각하게 받아 들여졌다. 우수선수가 넘쳐나 국가 상비군이나 전 대표선
수가 벤치를 지키는 팀도 있었다.
실업연맹이 과열 스카우트 방지 대책을 마련했다. 대한배구협회의 승인을 받아
1973년 졸업선수부터 드래프트에 의한 선수 선발방법을 도입하기로 했다. 시작부터
반발이 거셌다. 호남정유는 명문 풍문여고와의 연고관계를 주장했고 중고연맹에서는
우수선수들을 대학에 진학시키겠다고 맞섰다.
첫해 드래프트에 석유공사는 반대 의사를 표명하며 참가하지 않았다. 연고제를 고
집한 호남정유가 풍문여고 졸업생 4명을 모두 데려갔지만 직전년도 여자실업팀 성적
에 기초, 역순위로 추첨을 해 도로공사가 4명, 태광산업이 7명, 선경이 4명 국세청이
2명 등 모두 17명의 선수가 실업배구단에 취업했다.
1973년엔 여자 실업배구단 5개 팀이 창단했다. 6월엔 국세청팀을 인수한 대농이, 10
월엔 한일합섬팀이 창단했다. 동양나이론은 박서광 감독을 영입하며 중앙여고와 풍문
여고 졸업예정선수들로 팀을 구성했고, 대우실업의 박승수 창단 감독은 유봉여고 졸
업생 11명으로훈련에들어갔다. 드래프트에서신설팀에선수들을우선배정했다.
배구 주요 활동_
실업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