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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배구 100년의 발자취_
희망의 불씨를 지키며
제2의 전성기를 꿈꾸다
1992년 이란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와 1994년 카타르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
회에서 우승한 남자대표의 체격조건은 1980년대 선수들보다 월등히 좋았다. 한국
의 경제 성장기에 자란 덕분인지 선수들의 평균 신장이 190cm를 상회했다. 성인
무대에 나설 즈음 대부분 국내 최고의 플레이어로 성장했고, 대표선수들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신진식, 김세진, 신정섭, 장병철, 석진욱, 권순찬, 최태웅(이상 삼성화재), 이경수
(한양대) 등이 그들이다. 1996년 삼성화재가 창단하며 다시 모이게 된 이들이 신치용
대표감독호에 동반탑승하며 성인남자 대표의 제2 전성기를 기대케 했다.
1999년 시드니 올림픽 예선전을 앞둔 남자대표는 예전과는 달랐다. 9월 아시아선
수권대회에서 중국에 3-1로 이기고도 호주에 3-0으로 패해 올림픽 출전티켓을 놓쳤
지만 11월의 월드컵대회에선 홈팀 일본과 중국을 3-1, 3-0으로 물리쳤다. 게다가 통
산 다섯 차례 우승을 자랑해온 러시아에 3-2, 역전승 거두었다. 또 84 LA 올림픽과
88 서울 올림픽 금메달 팀 미국에도 3-2, 역전승을 낚았다.
러시아나 미국은 높이와 파워를 자랑하는 팀. 그동안 한국팀의 고질적인 약점으로
지적되어 온 체력 열세나 뒷심 부족에서 벗어났다고나 할까. 어떻든 6승5패로 7위를
마크했지만 우승팀 러시아와 4위팀 미국을 꺾어, 세계랭킹 15위권으로 떨어진 한국
이 세계 4강을 이룬 1978년 세계선수권대회에 이후 20여 년 만에 제2 전성기를 맞았
다는 기대감을 갖게 했다.
남자대표의 전력상승 요인은 성공적인 세대교체였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후,
이경수(200cm)를 비롯, 최태웅, 장병철, 손석범(이상 삼성화재) 등 신진들을 과감하
게 투입했다. 신지식-김세진의 ‘쌍포’가 막히면 맥없이 가라앉곤 했던 대표팀에 급성
장한 이경수와 장병철이 가세하자, 공격파워는 물론 공격 루트도 다양해지면서 불안
감을 걷어냈다. 1999년은 아이러니하게도 ‘스카우트 파동’으로 국내 실업대회가 개점
휴업, 선수들이 대표팀 훈련에만 몰두하면서 착실하게 체력관리를 하고 팀워크를 다
진 것도 한 가지 요인이었다.
올림픽 티켓을 놓고 한국의 신치용 감독과 중국의 왕자웨이 감독은 장외에서도 날
카로운 신경전을 벌여 주목을 받았다. 1970년대 말 아시아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였던
왕 감독은 한국에 연속해서 패해 온 만큼, 자국에서 펼치는 세기말 경기(12월 29일)
에서만은 연패의 고리를 끊고 싶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