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배구100년 - page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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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배구 100년의 발자취_
희망의 불씨를 지키며
꿈나무에 희망 걸다
서울 올림픽에 대비해선 1984년 일찌감치 남녀 배구 꿈나무 20명씩을 선발, 장학
금과 훈련보조금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에 한국 배구를 걸
머질 거목으로 자라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관심을 쏟았다. 1984년 10월 사우디아라
비아에서 열린 아시아청소년남자선수권대회에서 한국(임태호 감독)은 라이벌 중국을
두 차례나 3?0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해, 4년 뒤, 서울에서 열리는 올림픽 준비에 더
욱 큰 희망을 갖게 됐다. 1978년 세계선수권대회 4강 이후 정체 분위기를 보인 성인
남자대표팀에 비해 청소년에 더욱 기대를 갖게 하는 전과였다.
1987년 바레인 세계청소년남자선수권대회 결승에서 한국(심재호 감독)은 쿠바를
3?2로 꺾고 우승했다. 특히 준결승에서 청소년대회 3연속 우승팀 소련을 3?1로 제
압하는 기적을 일궈냈다. 대회 MVP에 오른 김은석과 세터상을 받은 이성희, 그리고
서남원, 마낙길, 박삼용은 성인배구에서도 세계 정상을 밟을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
성을 보여준 희망의 아이콘들이었다.
그러나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성적표는 최악이었다. 서울 올림픽에서 우리 남자팀
은 A조에서 브라질에만 3-2 역전승을 거뒀을 뿐이다. 소련, 불가리아, 이탈리아 등
장신 유럽팀에 완패했고 스웨덴에게서만 2세트를 따냈다. 힘과 높이를 자랑하는 유
럽 배구에 대비를 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 것과 다름없었다. 1984년 LA 올림픽 이
후, 4년간의 시간을 허비했다고 할 수 있는 참담한 결과였다. 남자(이규소 감독) 12개
참가팀 가운데 11위. 여자(황승언 감독) 8개 팀 중 8위로 바닥권으로 내려앉아 개최국
의 체면을 살리지 못했다. 그동안 올림픽 또는 세계선수권대회 등 굵직한 국제 대회
를 유치한 나라들이 2~3년의 준비기간을 통해 급성장하는 모습을 보여 왔는데 한국
배구는 순위로만 본다면 역대 최하위 성적을 기록해, 뒷걸음질한 모양새였다.
한국형 배구를 찾아라
한국 배구 부진의 원인은 어디에 있나? 배구인들은 여자배구의 경우, 이렇다 할 대
형 신인선수가 나오지 못한 점을 들었다. 대농의 이운임, 이명희 두 선수는 결혼 후까
지 대표팀 주전으로 아시안게임에서 활동했고, 박미희(대농)도 부상에서 회복될 때마
다 대표팀에 차출돼 1984년, 1988년 연이어 올림픽에 출전했다.
1~3회 FIVB 서울국제배구대회를 통해 ‘힘과 높이’를 갖춘 유럽 장신팀들이 그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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