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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배구 100년의 발자취_
희망의 연대
후발 주자인 서강대는 이용관 창단 코치의 착실한 지도로 한때 상당한 성과를 올렸
다. 그러나 1985년 서인석 총장이 팀 운영에 대한 이견을 드러내며 선수들과 마찰을
빚어 결국 4년 만에 해체되는 비운을 맞았다.
너무도 짧았던 영광
- 세계 4강에서 지역예선 탈락으로
우리 여자배구는 1973년부터 1976년까지 월드컵, 세계선수권대회, 올림픽 3위권을
굳게 지켰다. 뒤이어 남자배구는 세계선수권대회 4강, 아시안게임과 유니버시아드
우승의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맑은 날이 언제까지나 지속되지는 못하는 법. 짙게 드
리운 구름이 세찬 비바람을 예고하고 있었지만 내부 소용돌이에 빠진 협회는 적절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변화무쌍한 일기를 제대로 읽어낼 힘도 없었다.
중요 고비마다 우리의 발목을 잡던 일본의 덫을 힘겹게 벗어나던 무렵 일찍이 세계
배구를 휘어잡았던 동유럽에 이어 서유럽과 남북 미주에서 배구 열기가 일어나기 시
작했다. 13억의 인구 대국 중공의 기세도 날이 갈수록 거세어졌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앞둔 1979년 예선대회에서 우리 남녀 대표팀은 동반 탈
락이라는 쓰라림을 맛보았다. 11월 바레인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아 남자선수권대회 겸
올림픽 예선대회에서 우리 남자팀은 일본을 3-2로 물리쳤다.
일본과 상대해 사상 처음 거둔 승리였다. 수비 실수에다 상대 블로킹에 막혀
두 세트를 먼저 잃은 후 뒤늦게 강만수 장윤창의 강타와 정강섭 차주현의 속공이
빛을 발해 역전승한 것이다. 그러나 중공에게는 3-0으로 완패해 2위로 밀려나고
말았다.
여자팀 역시 12월 홍콩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아 여자선수권대회 겸 올림픽 예선대회
에서 중공에 3-0, 일본에 3-1로 패배, 3위에 그쳐 빈손으로 돌아왔다. 남자대표팀은
이듬해 1월 불가리아에서 열린 세계예선대회에 다시 한 번 도전했으나 불가리아, 루
마니아에 뒤져 끝내 올림픽 본선 티켓 획득에 실패했다.
모스크바 올림픽의 해인 1980년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항의해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가 일제히 올림픽 불참을 선언했다. 대한체육회도 정부 지침에 따라 올림픽 불참
을 결정했다.
출전 자격을 얻지 못했던 남녀 배구대표팀과 협회에 그 같은 결정이 과연 어느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