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배구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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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붕 수
나는 처음 경기대 여자 팀을 맡아 10년 동안
정성을 들여 키운 바 있고 다음 실업 팀으로는 도로공사 감독으로 5년 활동한 바 있
습니다. 지난번 리우 올림픽에서 우리 여자팀이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도 8강에서 끝
난 게 아쉬웠지만 네덜란드의 발전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대표선수 생활 중 부끄러운 이야기 한 토막이 있습니다. 일본서 열린 대회의 9인제
경기에서 일본에 2연패했는데 1차전 첫 세트를 3-21로 빼앗기자 손과 팔은 물론 머
리까지 아파오더군요.
플로팅 서브라는 걸 처음 봤는데 손으로 받으려다 얼굴에 맞기도 했습니다. 동료 선
수가 “고향 생각이 나!” 하더군요. 김용식 당시 주일대사도 경기가 끝나기 전에 자리
를 떠 버렸습니다. 그때 6인제, 소위 국제식에서는 인도가 우승하고, 9인제 극동식에
서는 일본이 우승했습니다.
최 이 식
부산세관에 들어가 3년 동안 선수로 뛸 때 내
포지션은 하프센터였습니다. 9인제 경기에서 그 위치는 수비에 주력하는 리베로 역
할인데 승패의 열쇠를 진 셈이지요. 사실 9인제의 수비선수는 게임을 누구보다 잘 보
고 게임의 흐름을 판단할 수 있으니까 작전은 늘 뒤에서 나오기 마련입니다.
훗날 부산고에 이어 인창고에서 코치생활을 하면서 6인제를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큰 사건이라도 난 듯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우리는 6인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를 때 일본 친구로부터 6인제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여 시도해 보았던 것
입니다.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내다 보니 일본에서 배운 것도 많고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
다. 1970년대 뮌헨 올림픽 이후 해체 단계에 있던 일본 도요보 팀을 맡아 4년 동안 지
도한 적도 있습니다. 그때 느낀 것은 배구는 머리싸움이라는 것이었습니다.
* ?일본의 영향을 받아 우리가 9인제 배구에 열을 올리던 시절 북한은 이미 공산권에 널리 보급되고 성행하던 6인제 배
구를 습득, 높은 경기력을 자랑했다. 평양에서 일찍 6인제 배구를 익히고 남하, 국가대표팀 주장으로 활약했던 김인수
원로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