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배구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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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 1947년엔 상황이 달라졌다. 동래가 준결승에서 휘문을 잡고
결승에 오르더니 기세 좋게 경기를 몰아붙여 우승배를 차지한 것이다.
1948년 전국체전에서는 경동이 동래와 결승에서 만나 완승, 처음으로 전국패권을
잡았다. 그러나 6·25전쟁 직전인 1949년은 동래의 해였다. 서울에서 새바람을 몰
고 온 보성이 경동을 2-1로 잡고 동래까지 제치는 데 성공했으나 3차 결승까지 가서
는 동래가 보성에 2-1로 힘겹게 이겨 전국체전의 왕자가 되었다.
이처럼 전국체전에서는 어느 한 팀의 독주를 허용하지 않는 혼전상황이었으나
1946년 처음 시작된 전국종별선수권대회에서는 동래중학이 단연 강세를 보여 2년 연
속 패권을 잡았다.
학교 팀들의 경쟁 속에서 흥미 있는 것 중 하나가 여중부의 자존심 대결이었다.
명문교의 전통과 명예를 건 라이벌 의식이 작용하여 배구 코트를 더욱 뜨겁게 달구
었다.
광복 전후의 학제는 변화가 심하여 한동안 5년 중학제로 가다가 한 때는 고등여학
교, 줄여서 고녀(高女)시대가 있었다. 학원 배구 판도에도 변화가 나타나 서울 팀들은
서울대로 자존심을 내세우고 지방 팀들도 서로의 우열 다툼이 치열해졌다. 뒤를 이어
서울 팀에 대한 지방의 총공세 양상을 나타났다.
광복 이듬해 1946년 전국체전 준결승에서는 경기(京畿)여고-이화(梨花)여고의 대
결에 이어 숙명(淑明)여고-진명(進明)여고의 승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결국 이화와
진명이 탈락하고 결승에 남은 것은 경기와 숙명이었다. 결과는 경기의 완승. 남중부
에서 역시 경기가 동래를 잠재우고 우승해 서울 남녀가 함께 환성을 터뜨렸다.
경기여중 시대는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이화여중이 중학리그와 전국체전에서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던 것이다. 이화는 1949년 전국체전에 이어 중학리그에서 덕성
여고를 연파했으며 6·25전란이 끝난 뒤에도 덕성, 중앙을 제치고 종합 챔피언의 자
리를 재확인했다.
이처럼 광복 이후 기세당당하던 서울 학교 팀들의 파워는 1950년대 후반 들어 지방
팀들의 거센 도전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자부에서 먼저 회오리바람이 일기 시작했
다. 전북 신태인의 화호(禾湖)여중과 부산 남성(南星)여고. 이밖에도 부산여중과 군산
‘맨발의 팀’
화호여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