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배구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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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 이전이므로 중학부가 학생 배구의 꽃이라 할 만했다. 광복의 기쁨 속에 사기충
천한 젊은이들이 펼치는 배구 열전은 장안의 화제가 되곤 했다.
광복 이전 제1고보를 졸업한 안종호(安鍾浩), 박계조(朴啓祚), 김명수(金明洙)가 경
기 지도자로, 이상용(李相龍), 오광섭(吳光燮), 장동은(張東殷)은 행정 지도자로 자리
잡은 것처럼, 광복 제2세대들도 적당히 역할을 나누어 가졌다.
이때 경동중학 멤버는 장경환(張慶煥), 유붕수(柳朋秀), 송복상(宋馥相), 오만흥(吳
萬興)을 축으로 한 최강의 진용이었다. 거기에 유정웅(柳政雄), 김만용(金萬龍), 백대
명(白大名)이 가세하여 전성기를 구가했다.
승패와 우열을 떠나 이때의 경동 주전들은
일찍이 볼 수 없던 독창적인 전법과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누구
도 생각하지 못한 4-3-2 시스템을 말한다.
전위에 4명을 배치함으로써 중위 3명을 포함
7명이 공격에 가담하고 후위 2명이 수비 임
무를 수행하는 형태다. 이렇게 되면 공격력이
강화되어 다양한 시간차 공격이나 연공의 변
화가 가능한 대신 후위의 기동성과 수비 폭이
줄어들어 공수 전환이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시스템은 장경환을 중심으로 선수들이 고안해낸 것이다. 하기는 경동중
학에는 정해진 코치가 없어 자율 훈련으로 그때그때 변화무쌍한 아이디어를 짜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들의 훈련시간이란 조회시간 전 한 시간, 점심시간 후 30분, 또 방과 후 한 시간,
이렇게 하루 3시간 정도 손발을 맞추고 겁 없이 전국대회에 도전했다. 배구공을 꿰매
어 쓰다가 원피가 닳아 찢어지면 남대문시장을 뒤져 수구공 원피를 구해 쓰기도 했
다. 유니폼이란 것도 소매 없는 미제 러닝셔츠를 구해 가슴에 학교마크를 붙였다. 원
시시대나 다름없는 초기의 어려움은 하나의 전설처럼 남아 있다.
경기중학은 경동중학에 비해 한 수 위였다. 1947년 첫 전국대회 때 경기중학은 단
연 강세였다. 그러나 경동이 경기 전성기의 리더 김명수를 게임 감독으로 맞으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경동 주장 장경환은 두뇌 플레이의 다양한 작전을 구사했다. 장경
환의 한 손 토스는 거의 홀딩성이었으나 심판에 잡히지 않을 만큼 연구에 연구를 거
1971
1980
1990
1999
2010
2016
중등부 남자
고등부 남자
고등부 여자
대학부 남자
대학부 여자
중등부 여자
45
40
35
30
25
20
15
10
5
◆각급 학교 등록팀 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