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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 서울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경성운동장으로 직행, 결승전에만 출전했다.
당시의 게임 상황과 분위기에 대해 구연묵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보전은 멤버도 좋았지만 선수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나의 선수생활을 통해 그때와 같은 응집력과 투지는 다시 찾
아볼 수 없었다. 그 감격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한편 연전은 광복 이후 배구팀 새 출발을 위해 심기일전, 선수 확보에 힘썼으나
1946년 3·1절 기념대회에 한때 모습을 나타낸 뒤로는 활동이 거의 없었다. 이 대회
에서 보전은 먼저 치전(치과대학)을 가볍게 물리치고 결승에 올랐으나 경성대 예과에
패퇴한 뒤를 이어 1946년 제2회 전국체전에서도 공과대와 법학대를 각각 가볍게 눌
러 우승을 바라보는듯하더니 결승에서 치과대에 2-1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보전의 후신 고려대가 비로소 전국 패권을 차지한 것은 1948년 4월 대학리그 때였
다. 여기서 고려대는 공과대, 사범대, 문리대를 차례로 물리치고 우승했으며 광복 이
후 초기 전국체전에서는 두 차례 전경성선발팀을 연파, 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광복 전후의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한때 치대와 공대를 앞세운 당시 경성대의 위협
을 받은 외에는 보전의 기세를 저지할 팀은 없었다. 보전의 전통은 훗날 1960년대에
접어들어 박무(朴武), 박상원(朴相元), 서반석(徐磻錫) 등의 고려대 시대로 다시 한 번
꽃을 피우는 듯했으나 이들의 지도자 변신(제일은)과 해외 진출(미국, 캐나다)로 배구
명문의 마지막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즈음 문교부와 대한체육회도 연세대-고려대 라이벌의 배구 명승부전을 적극 지
원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며 배구계의 열화 같은 염원에도 불구하고 연세대 팀은 부활
하지 못했고 이들의 명문 대결도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광복 이후 배구 코트의 화제가 된 명승부로 경기, 경복, 경동중학의 3각 대결이 있
었다. 이 가운데 가장 역사가 오랜 명문(名門)이라면 두말할 것 없이 광복 이전 제1고
보의 전통을 이어받은 경기중학이다. 1930년대부터 이미 걸출한 인재들을 다수 키워
내며 명문의 전통을 이어온 경기는 배구에서만큼은 어느 학교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
큼 독보적인 존재였다.
이때의 중학교는 6년제로 오늘날의 중, 고등학교 과정이다. 더구나 대학부가 자리
경기·경복·
경동의 3각
대결
배구 주요 활동_
성인 배구의 요람,
학원 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