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배구100년 - page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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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느끼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 상디에의 결전은 우리 선수단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시간이 흘러 추억이
라고 하지만 우리 선수들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환
희의 기억이자 또한 아픈 기억이기도 하다.
상디에 예선전 직전 소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
표돼 남북은 해빙무드였지만 체제 우위 경쟁은 여전
했다. 따라서 북한과의 대결이 문제였다. 당시 북한의
실력도 상당해 일본은 북한의 우세를 점쳤을 정도였
다. 그러자 정부에서 “북한에 질 것 같으면 아예 출전
을 하지 마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스포츠에서 북한
에 패하는 것 자체를 마치 정치 체제 열세를 자인하는
꼴로 인식되던 때의 해프닝이었다.
북한과의 예선전에 대비해 일본 배구의 대부인 마
쓰다이라를 초청해 대표 팀 강화훈련까지 했던 배구
협회는 이낙선 회장이 직접 육영수 여사를 찾아가 설
득한 끝에 간신히 출전 허락을 받아냈다.
우리 선수단은 북한과의 상디에 결전을 위해 일본, 네덜란드, 서독으로 2개월 반이
나 전지훈련을 했다. 전지훈련을 통해 꽤 경기 경험을 쌓기는 했지만 오랜 외국 생활
로 선수들은 거의 녹초가 되어 있었다. 더구나 우리는 북한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
었다. 북한의 정보라고는 겨우 일본 배구 관계자들로부터 주워 들은 몇 마디가 고작
이었다. 여기에 우리 팀은 먼저 자유중국과 경기를 갖게 돼 북한에게 우리 전력을 고
스란히 내 보일 수밖에 없어 이래저래 불리한 편이었다.
우리 대표팀은 보안사, 수경사에서 각 3명, 충주비료 2명, 대한항공, 체신 각 1명,
이밖에 17세의 고등학생 1명(부산성지공고 강만수)으로 짜였다. 평균 나이 22세, 평
균 신장은 186cm로 역대 최장신이었다. 패기 있고 파워는 있었지만 노련미가 부족했
다. 전지훈련을 통해 경기 경험을 쌓았지만 나이가 어려 자칫 분위기에 휩싸이면 럭
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몰랐다.
남과 북의 대결은 말 그대로 초긴장 상태에서 진행됐다. 너무 긴장한 탓에 양 측 선
수들은 모두 몸이 굳어 있었다. 우리 선수들의 몸 놀림도 평소보다 둔했고 북한의 자
1972 뮌헨 올림픽 개회식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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