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배구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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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다. 이를 통해 가능성 있는 어린 선수들을 발굴하고 양성함으로써 전문 선수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전국체육대회와 전국소년체육대회는 어린 유소년들이나 학생 선수들
이 정상에의 꿈을 키우는 터전으로 훌륭한 역할을 해냈다. 학교를 대표하고 17개 시
도를 대표해 출전한 선수들에게는 자긍심을 심어 주는 한편으로 목표를 향해 달려가
는 필수 과정으로 자리 잡았다. 각 종목의 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이 전국소년체육대회
와 전국체육대회를 통해 배출되었다. 이들의 노력이 한데 모여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례없는 짧은 시간에 세계 스포츠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한국 배구의 밑거름이 된 전국체전
일제 압박을 받던 1920년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모태로 하는 전국체육대회(이하
전국체전)은 광복 이후 우리 배구 발전의 든든한 토양으로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당
시 우리나라는 일본의 영향으로 극동식이라 부르는 9인제 배구가 유행했었고 현재
형태인 6인제는 국제식이라고 해서 거의 보급이 되지 않았다.
이런 시기에 광복이 되어 전국체전이 부활되면서부터 9인제 배구를 정식종목으로
채택해 전국에 배구 붐을 일게 했다. 또 1959년 제40회 서울체전부터 9인제와 6인제
경기를 동시에 진행함으로써 과도기의 우리나라 배구가 국제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
는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이후 5년이 지난 1964년 제45회 경기체전부터는 6인제 경
기만 실시했다.
1964년 도쿄 올림픽에 우리 남녀 배구대표팀이
참가해 비록 남자 9패, 여자 5패로 최하위에 머물렀
지만 만약 전국체전에서 국제식인 6인제 배구를 채
택하지 않았다면 올림픽 출전은 꿈도 꾸기 어려웠
을 것이다.
또 전국체전은 광복이 되고 난 뒤 첫 대회인 1945
년 제26회 체전부터 1961년 체전까지 거의 서울에
서 개최했다. 지방에는 실내체육관이 없는 등 체육
전국체육대회
전국체전 개막에 앞서 열리는 기술
총회 및 심판 클리닉 광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