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배구100년 - page 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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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 윤상용, 윤형우, 손재홍, 조태준(선수 출신), 오수성, 이영철, 유승현, 이정호, 이
준희, 윤치영(지원 사원 출신)
우리 배구의 올림픽 도전 발자취는 언제나 자랑스럽다. 많은 사람들이 1963년 뉴델
리에서의 남북한 첫 대결, 특히 올림픽 배구의 서막(예선)을 장식한 통쾌한 승리를 기
억하고 있지만 8년 후 프랑스 상디에의 뮌헨 올림픽 예선전 역시 자랑스러운 승리였
다. 당시의 우리 전사들, 남자 대표선수들은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도 자주 모여 그날
그때의 기쁨을 회상하곤 한다.
당시에도 남북은 국제무대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던 때여서 선수들의 각오는 비장했
다. 이낙선 배구협회장을 비롯한 협회 임원들의 정신적 부담도 못지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 선수들은 훈련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뮌헨 본 대회를 앞둔 1972년 7월 일본 전지훈련을 통해 매일 10게임씩 실전훈련
을 쌓으면서 정신력과 체력을 다지는 고된 일정이 계속되었다. 이어 7월 18일부터
24일까지 네덜란드 전지훈련이 이어졌다. 그러나 누구 하나 힘들다고 말을 하지
못했다.
북한 팀의 실력과 전술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가 없던 터였다. 그런데 장신의 네
덜란드가 북한에 3-1로 졌다는 소식에 긴장감은 고조되었다. 이런저런 해프닝도 연
발했다. 훈련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푸느라 자전거를 타다가 잇달아 두 명이나 다리를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다. 계속되는 긴장도 풀고 무료함도 달랜다는 생각에 화장실 안
에서 고성으로 노래 부르다 핀잔을 받는 촌극도 있었다.
예선대회에서 우리 팀이 먼저 자유중국과 대전, 3-0으로 이겼다. 북한은 우리
경기를 먼저 관전한 후라 유리한 입장이었지만 우리 선수들보다 더 긴장한 탓인지
세트 스코어 1-1에서 어이없이 무너져 우리 팀이 3-1로 승리했다. 팀의 승리로,
엄청난 긴장에서의 해방감으로 선수단은 축제 분위기였다. 2년여 동안 올림픽 본
선보다는 북한과의 대결을 준비하느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피로가 극도에 달
해 있었던 것이다.
오광섭 단장의 방침에 따라 선수들은 알프스 몽블랑 관광으로 기분을 전환하며 컨
디션을 조절한 다음 뮌헨 올림픽 선수촌에 입촌했다. 우리 팀은 올림픽 본선에서 폴
배구 조직과 행정_
친목단체
상디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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