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배구100년 - page 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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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찾아 경기를 관전하고 시상하며 선수들을 격려함은 물론 협회 재정을 위해
동분서주하며 애를 썼다. 이들의 노력에 의해 협회는 점차 틀을 갖추게 되었다. 조동
식이 재임 중이던 1948년 대한민국 국호 제정에 따라 9월에 조선체육회는 대한체육
회로, 조선배구협회는 대한배구협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협회 운영에 혁신적인 바람을 일으키고 국제무대 도전의 의지를 본격적으로 구현
한 인물은 15대 이낙선(국세청장)이다. 전임 박준규(국회의원)에 떠밀리다시피 협회
를 맡게 된 그는 우선 대표팀 전력을 강화해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려야만 국
내 저변을 확대하고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며 굳세게 밀어붙였다. 이 같은 전략에 발
맞춰 김한수(대신고 교장)는 협회 살림과 대표팀 전력강화에, 임형빈(중앙여고 교장)
은 국제무대에서 우리의 입지를 다지는 데 힘을 쏟았다. 결과는 1970년대에 이룩한
몬트리올 올림픽 여자 동메달, 세계선수권대회 남녀 4강의 성적으로 나타났다. 물론
그 과정에는 많은 배구인들의 헌신, 기업들의 참여와 지원이 있었다. 이낙선은 1979
년 19대까지 연임하며 협회의 기틀을 닦아 놓았다.
이낙선 퇴임 후 혼란 끝에 배구 살림을 맡은 22대 조석래(효성그룹 회장)는 1980년
제1회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를 서울에 유치해 남녀 동반 우승을 거두는 등 협회 운
영에 성의를 기울였으나 배구인들과의 조화에는 실패해 도중하차하고 말았다.
진통 끝에 대한체육회의 천거로 회장직을 승계한 24대 김중원(한일합섬 사장)은 국
내 배구의 활성화를 꾀해 1984년 대통령배대회를 창설, 프로배구 출범의 기초을 닦
았다. 또한 FIVB 서울국제배구대회를 창설해 세계 강호들과의 교류를 강화해 대표팀
경기력 향상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기울인 노력에 비해 국제대회에서 그다지 좋은
배구 조직과 행정_
대한민국배구협회
2016 정기 대의원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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