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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e > 어울림방 > 배구인 소식 > [최고의 한일전 승리중의 하나-1996년의 한일전--ㄱ.신진식 ㄴ.김상우 ㄷ.신영철 ㄹ.임도헌 ㅁ.박희상 등등]

 제목 | 강추 40년전-영웅들-조혜정-유경화-유정혜-정순옥-이순복-이순옥-마금자-변경자-백명선-윤영래-장혜숙-박미금]--및 主공격수 박인실 제명^사건?] 및 160~70년대 韓國 배구 歷史!
 작성자 | 한준구 작성일  | 2016/05/21 11:29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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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철 스포츠 뒤집기]

@+신명철 스포츠 평론가는?

(고령으로 몇 년 전 돌아가신 최고의 스포츠 평론가-조동표 선생이후)

스포츠 평론가 기영노씨와 쌍벽을 이루는

권위있는 스포츠 평론가입니다-한준구 견해

女子 배구,

40년 前 그들은 정말 예뻤다

기사입력 2016.05.21 오후 12:32

▲ 활짝 웃고 있는 한국 여자 배구 대표팀 ⓒ FIV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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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전 승리 후 코트에서 승리의 V자를 그리며 기념사진을 찍은 여자 배구 대표팀의 모습.

한·일전 승리 후

코트에서 승리의 V자를 그리며

기념사진을 찍은 여자 배구 대표팀의 모습.

/FIVB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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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티비뉴스측 및 ^^신명철 편집국장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1976년 한국 스포츠는

2월 7일 열린 1975년도 대한체육회 정기 대의원 총회에서

김택수 회장이 다시 선출되면서 시작됐다.

김택수 회장은 바뀐 정관에 따라 4년 임기로

대한체육회를 이끌게 됐다.(지난 60여년간의 한국 스포츠에서 있어서

가장 뛰어난거물급 통큰 회장님으로

카리스마가 대단했던 기억이 납니다-한준구 촌평)

그 분은

1976년에 서울 집 한채 400만원 할 적에-2층 큰 양옥집 1500만원 할적에

금메달에 무려 1억원의 포상금을 내걸었고

해방이후 첫 금메달의 주인공이 된 레슬링의 영웅 *양정모선수가

위의 포상금을 받은 행운을 누린 바 있습니다-한준구 촌평)

그해 한국 스포츠의 최대 관심사는

7월 17일부터 8월 1일까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제 21회 하계 올림픽이었다.

4년 전 제20회 뮌헨 하계 대회에서

올림픽 무대에 처음 나선 북한에 뒤진 한국으로서는

북한과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지상 과제를 안고 있었다.

몬트리올 올림픽과 제 12회 인스부르크 동계 올림픽에 대비해

1975년과 1976년 상반기에 진행된

대한체육회 국가 대표 선수 강화 훈련 실적에 따르면

참여 선수는 198명, 임원은 27명,

훈련 일수는 426일에 이르렀다.

1976년에는 올림픽에서 입상한 전적이 있거나

입상 전망이 확실해 국위 선양이 기대되는 종목

그리고 지역 예선을 통과한 종목 등 소수 정예로 강훈련을 실시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구성된 대표 선수단은

임원 22명과 선수 50명으로 뮌헨 대회를 약간 웃도는 규모였다.

출전 종목은 남녀 배구.

레슬링과 유도, 복싱, 사격이었다

사격은 1978년 서울에서 열릴 예정인 세계선수권대회 개최국으로서

위상을 고려해

뮌헨 대회에 이어 또다시 참가하게 됐다.

남자 배구는 애초에는 ‘상위 입상이 어렵다’는 대한체육회의 판단에 따라

제외할 방침이었으나

지역 예선을 통과한 마당에 본선 출전을 가로막는 것은

지나친 처사가 아니냐”는

대한배구협회의 거센 반발에 밀려 선수단에 넣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사격과 복싱, 남자 배구를 뺀 종목에서 모두 메달 따

대한체육회의 선수단 구성 방침은 비교적 정확했던 것으로 판명 났다.

1970년대 한국 스포츠를 관통한

김택수 會長의 ‘선 체력 후 기술’ 방침은

시대 상황으로 봐 당위성이 있었다.

그러나 다소의 진통도 있었다.

몬트리올 올림픽을 불과 두 달여 앞둔 4월 25일

여자 배구 대표팀 주 공격수 박인실

선수촌에서 이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무렵 대한배구협회를 맡은 이낙선 회장은

올림픽 메달을 목표로 후원회를 조직하고 발전 기금을 마련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했다.

그리고 몬트리올 대회를 앞두고

1964년 도쿄 대회에서

일본 여자 배구를 올림픽 금메달로 이끈

다이마쓰 히로부미를 초빙해

김한수 감독, 전호관 코치와 함께 대표팀을 지도하도록 했다.

‘동양의 마녀’라는 신화를 만든 다이마쓰는

‘회전 리시브’ 등 혹독한 훈련의 대명사였다.

강훈련이 거듭되는 가운데 선수들의 반발이 있었고

결국 박인실무단으로 퇴촌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박인실

당시로는 174cm의 큰 키에

뛰어난 점프력과 강타를 지닌

한국 여자 배구의 간판 공격수였다.

이 사건은 당시 상당한 파문과 논란을 일으켰지만

결국 협회는 박인실을 제명했다.

올림픽에서도 여자 배구

동메달까지 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8개국이 출전한 가운데

조별 리그 B조에 속한 한국은

첫 경기에서 이 대회 준우승국인 소련과

접전을 펼친 끝에 1-3으로 졌다.

그러나 이후

쿠바와 동독을

풀세트 접전 끝에 각각 3-2로 물리치고 .

조 2위로 준결승전에 올랐다

한국은 조별 리그 A조 1위이자 대회 우승국인 일본에 0-3으로 졌으나

3위 결정전에서

헝가리에

3-1(12-15 15-12 15-10 15-6) 역전승을 거두고

동메달을 거머쥐었다.

한국 스포츠 사상 첫 여자 올림픽 메달리스트의 영예를 안은 선수는

신세대 스포츠 팬들에게도 이름이 꽤 알려져 있는

‘나는 작은 새’

조혜정 및

이순복,

유경화(당시 최고 인기 스타-별명-얼음공주),

유정혜,

정순옥,

마금자,

장혜숙,

이순옥,

박미금,

변경자,

백명선,

윤영내 등 12명이다.

이들 가운데

유경화와 유정혜는 공격력이 있는 세터여서

‘더블 세터’를 이뤄 주 공격수인 조혜정(1m64cm)과 함께

메달 획득에 크게 이바지했다.

40년 전 그들은 정말 예뻤다.

그리고 21일,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여자 배구 세계 예선을 통과한

김연경을 비롯한 12명의 선수들은

40년 전 선배들보다 조금 더 예쁘다.

오는 8월, 한국 여자 배구는 다시 한번 올림픽 메달에 도전한다.

4년 전 런던 올림픽 동메달 결정전에서

일본에 0-3(22-25 24-26 21-25)으로 져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던

대회 MVP 김연경을 비롯한

12명의 한국 선수들에게

하늘은 다시 한번 기회를 줬다.

홈 코트의 일본이 4년 전과 비슷하게 ‘장난질’을 쳤지만.

[여자 배구의 올림픽 출전을 계기로 ‘신명철의 스포츠 뒤집기’는 오는 30일부터 배구 발전사를 다룰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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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철스포츠 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史-배구(3)

기사입력 2016.06.06 오전 09:41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차지한 여자 배구 선수들.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나는 작은 새’조혜정이다.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측 및 ^^

신명철 편집국장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1964년 도쿄 올림픽 한국 선수단 가운데

가장 다급하게 경기에 나선 종목이 여자 배구였다.

지역 예선에서 아시아 대표로 뽑힌 북한이

느닷없이 철수하자

FIVB(국제배구연맹)가

지역 예선에서 2위를 한 한국에 출전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배구는 개최국 일본의 전략 종목이었다.

일본은 실제로 이 대회 배구 여자부에서 금메달,

남자부에서 동메달을 손에 넣었다.

여자 배구는 북한의 불참으로 출전국이 5개국으로 줄면서

정식 종목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위기에 놓였다.

한국은 FIVB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미 해체된 대표팀을 급히 다시 소집해 출전했으나

일본 소련 폴란드 등에 힘 한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꼴찌에 그쳤다.

그러나 여자 배구는 이후 기량을 갈고닦아

1976년 몬트리올 대회에서 동메달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룬다.

1963년 12월 뉴델리에서 열린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북한과 총성 없는 전쟁을 한 끝에 3-2로 이기는 등 6전 전승을 거두며

본선에 오른 한국 남자 배구는

세계 수준과 실력 차를 절감하며 9전 전패로 꼴찌에 머물렀다.

다만 헝가리, 루마니아, 미국 등과 경기에서는

풀세트 접전을 펼치며 성장 가능성을 확인했다.<2편에서 계속>

배구가 처음으로 정식 종목으로 열린

1964년 도쿄 올림픽(6위·꼴찌) 이후

한국 여자대표팀은?

대회마다 순위가 한 계단씩 올라가는 등 발전을 거듭했다.

1968년 멕시코시티 대회 5위,

1972년 뮌헨 대회 4위에 이어

1976년 몬트리올 대회에서 올림픽 출전 사상 처음으로

단체 구기 종목 메달(동)을 딴다.

도쿄 올림픽이 끝나고 2년 뒤

방콕에서 열린 제 5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배구는 남녀 모두 일본에 져 은메달에 그쳤다.

그냥 진 게 아니고 0-3 완패였다.

세트스코어는 남자는 7-15, 5-15, 5-15였고

여자는 11-15, 3-15, 6-15였다.

수준 차가 매우 컸다.

그럴 만도 했다.

일본 남,녀 대표팀은?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여자부 금메달과 남자부 동메달에 이어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도

남자부 은메달, 여자부 은메달을 차지한

그 무렵 세계 정상권의 배구 강국이었다.

일본여자의 경우 남자보다 더 전력이 강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1960년(브라질) 대회 준우승,

1962년 대회(소련) 우승,

1967년 대회(일본) 우승 등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韓國은

1967년 세계여자배구선수권대회에서 3위를 했지만

이 대회에는 배구가 강한 소련 등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불참했다.

이 대회는 이듬해 멕시코시티에서 열릴 올림픽 예선을 겸하고 있었다.

한국 여자 배구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4강 안에 든 건

이 대회에 이어

1974년 대회(멕시코) 3위,

1978년 대회(소련) 4위,

1994년 대회(브라질) 4위 등

4차례로

1978년 대회(이탈리아)에서

딱 한 차례 4강에 오른 남자보다 훨씬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한국여자 배구는

1967년 세계선수권대회 3위 자격으로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 출전했다.

개막식 다음날 벌어진 첫 경기에서

폴란드와 맞서 1, 2세트를 15-10, 15-12로 따 낸 뒤 3, 4세트를 10-15, 12-15로 내줘 승부를 마지막 세트로 넘겼다.

5세트 들어 최선을 다했으나 듀스 끝에 15-17로 아깝게 졌다.

이후 페루와 소련에 0-3으로 졌으나

미국과 멕시코를 3-1, 3-0으로 잡는 등 선전했다.

당시 세계 수준의 경기력을 자랑하고 있던 일본에

0-3(5-15 5-15 4-15)으로 힘없이 물러났으나

마지막 경기에서 불꽃 투혼을 발휘해

체코슬로바키아를 3-1로 따돌리고

최종 전적 3승4패로 애초 목표치인 5위를 차지했다.

첫 경기에서 폴란드를 잡았다면 1976년 몬트리올 대회가 아닌, 이 대회에서 단체 구기 종목 올림픽 첫 메달의 꿈을 이룰 수도 있었다.

8개국이 출전한 여자 배구 최종 순위는 1위 소련, 2위 일본, 3위 폴란드였다.

1970년 방콕에서 두 번째로 열린

제 6회 아시아경기대회는

여자 배구가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된

의미 있는 대회였다.

남녀 모두 또다시 일본의 벽을 넘지 못하며

풀리그로 진행된 경기에서

각각 6승1패를 기록하며 은메달에 만족했다.

남자는 일본에 0-3(6-15 4-15 5-15)으로 완패했으나

김영자와 조혜정, 이순복, 윤영내 등

노장과 신예가 조화를 이룬 여자는

일본에 1-3(4-15 12-15 15-13 9-15)으로 따라붙으며

성장 가능성을 보였다.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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