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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e > 어울림방 > 자유게시판 > [응답하라-1991--당시 美男 스타 ^하종화( 하혜진-하혜민 선수-父親) 와 벌떼들--漢陽大 배구팀 vs. 경기대 배구팀] 및 女子배구의 ^+중흥 다시 오라]

 제목 | 잡담 [응답하라-1991--당시 美男 스타 ^하종화( 하혜진-하혜민 선수-父親) 와 벌떼들--漢陽大 배구팀 vs. 경기대 배구팀] 및 女子배구의 ^+중흥 다시 오라]
 작성자 | 한준구 작성일  | 2017/04/12 6:14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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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제목과 관련한 다음 글을 읽어보시길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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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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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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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mg.yonhapnews.co.kr/photo/yna/YH/2014/09/11/PYH2014091104070001300_P2.jpg
두 딸과 함께. 가운데는 작은딸 하혜진, 오른쪽은 큰딸 하혜민.

[편집]

슬하에 네 자녀가 있다. 특히 큰딸인 하혜민과 작은딸인 하혜진이 아버지를 따라 배구에 입문하여 2010년대 여자고교 배구에서 진주 선명여자고등학교가 강팀이 되는 데 주역으로 활약했다. 하혜민은 프로 선수가 되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2013년에 수시모집으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하여 한때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고, 언니보다 키가 더 큰 하혜진은 아버지를 따라 프로선수가 됐다. 하혜진은 2014 KOVO 드래프트에서 전체 3번으로 한국도로공사에 지명되어 2014-15 시즌에 데뷔했다.

낙향한 후 사실상 고향에서 정착하다 보니, 친정 팀의 감독을 맡았을 적에는 시즌 중에 당시 숙소의 소재지인 용인[5]에 있게 되어 본의 아니게 가족들과 떨어져서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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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서비스 배구 팀의 대표적인 스타였다. 1987년 윤종일과 함께 진주동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에 입학하여 한양대학교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졸업반이었던 1991년에는 장재원, 문양훈, 1년 후배 강성형과 함께 실업 팀 금성을 물리치고 당시에는 최초의 대학 팀의 대통령배 대회 우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해 하종화의 활약으로 그를 비롯한 한양대학교 동기생들을 놓고 현대자동차서비스금성이 스카우트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금성 배구단이 이들의 영입을 포기하면서 동기생인 윤종일, 장재원, 문양훈과 함께 현대자동차서비스에 입단하게 되었다.

하종화는 현대자동차서비스 입단 후 마낙길과 함께 간판 공격수로 활약했으나 실업 팀에서의 첫 우승을 1994년에 경험하였다. 1995년 시즌 후 상무에 입대하려고 했으나 입대 시기를 두고 상무와 현대 구단 간에 마찰이 있었다. 결국 상무 입대를 거부하고 경기도 양주시에서 방위병으로 복무하기도 했으나 이듬해 상무로 옮겨 복무를 마쳤다. 하지만 상무에서 제대한 후 재활하는 등 예전 기량을 회복하지 못해 후인정, 백승헌, 이인구에게 밀려 2000년에 은퇴하였다. 이후 현대캐피탈의 코치로 활동하다가 송만덕 감독이 부임하자 코치직에서 사임했다. 이후 교원 자격증을 취득하여 진주로 귀향, 2001년에 모교인 진주동명고등학교 체육교사로 부임함과 동시에, 배구부 감독에 취임했다.[1] 진주동명고등학교에서 그는 전광인 등의 선수들을 양성하였다. 2011년 현대캐피탈NH농협 2010~2011 V-리그 플레이오프에서 삼성화재에게 패한 뒤 김호철 감독이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친정 팀의 후임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2년 연속 결승 진출에 실패하여 2013년 4월 4일에 현대캐피탈의 감독직에서 물러났다.[2]

현대캐피탈의 감독직에서 물러난 그는 진주로 돌아와 2014년 3월 모교의 감독 및 체육 교사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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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글 

응답하라-1991년-오늘 2월17일-

하종화-윤종일-강성형-

문양훈-장재원-임도헌-

진창욱-제희경 등-

배구 중흥기 다시 돌아오라!

 작성자|한준구작성일 |2016/02/17 1:38 pm
글 편집/삭제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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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제목과 관련한 다음 글을

흥미삼아 읽어보시길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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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보도를 해주신

노컷뉴스측 및 **김동욱 기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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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증권-현대양강 구도를 깬 한양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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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오늘 뭐했지?]

고려증권 vs. 현대

兩强 구도 깬 한양大

[CBS노컷뉴스 김동욱 기자에게 감사드립니다.]

한양大 시절 하종화. (당시 중계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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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문화가 다시 떠오르고 있습니다.

2015~2016시즌 V-리그도 어느덧 막바지로 치닫고 있습니다.

시계를 되돌려보면

그런 대통령배 배구대회에 대학 돌풍이 불어닥쳤습니다.

25년 전 오늘. 그러니까 1991년 2월17일에는

특히나 1991년 대통령배 배구대회는

'응답하라' 시리즈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토토가'는

길거리에 다시 90년대 음악이 흐르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90년대는 스포츠의 중흥기였습니다.

하이틴 잡지에

가수, 배우, 개그맨 등과 함께

스포츠 스타의 인기 순위가 실릴 정도였으니까요.

그렇다면 90년대 스포츠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병신년(丙申年)인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1991년 오늘로 돌아가보려 합니다.]

6라운드 팀당 4~5경기만 남긴 상황에서

현대캐피탈이 선두를 달리고 있는데요.

물론 삼성화재와 V-리그를 양분해온 전통의 강호지만,

지난 시즌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던 것을 감안하면

돌풍이라는 표현을 써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V-리그가 아닌 대통령배 배구대회

고려증권, 그리고 현대자동차써비스가

양분해왔습니다.

실제로 1990년 7회 대회까지

고려증권이 4회, 현대자동차써비스가 3회 우승

차지했습니다.

고려증권, 현대자동차써비스가 아닌

대학팀 한양대가

형님들을 차례로 격파하고

대통령배 배구 2차 대회 정상에 오른 날입니다.

1차 대회는 실업, 대학이 따로 경기를 펼쳐

2차 대회 진출팀(실업 4개, 대학 3개)을 가렸으니

형님과 아우의 진짜 맞대결은 2차 대회였던 셈이겠죠.

대학팀들이 상승세가 거셌습니다.

한양대 뿐 아니라

성균관대, 경희대도

실업 형님들의 눈물을 쏙 빼놨습니다.

당시 한양대는 호화멤버였습니다.

일찌감치 국가대표 주포로 자리잡은

레프트 하종화가 버티고 있었고,

국내 최고 센터로 발돋움한

윤종일이 중앙을 지켰죠.

또 강성형 현 KB손해보험 감독,

문양훈이라는 좌우 공격수도 있었습니다.

세터 장재원까지

1987년 세계청소년대회 우승 멤버들이

한양대 소속이었습니다.

임도헌 현 삼성화재 감독과

193cm 장신 세터 진창욱 콤비가 있었고,

경기대에는

207cm 최장신 센터 제희경이 뛰고 있었습니다.

당시 최강팀이었던 고려증권을 3-2로 격파하면서

2차 대회를 5승1패로 마치게 됩니다.

유일한 패배는 바로 현대자동차써비스에게 당했습니다.

남은 경기대, 금성전에서 모두 3-0으로 이기지 않는 한

한양대의 우승이 확정되는 상황이었는데요.

17일 현대자동차써비스가

경기대와 풀세트 접전 끝에 승리하면서

한양대의 2차 대회 우승이 확정됐습니다.

성균관대와 경기대의 돌풍은

2차 대회에서 멈췄습니다.

경기대와 성균관대 모두 2승4패를 기록,

3승3패를 기록한 고려증권,

금성에게 3차 대회 진출 티켓을 양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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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화
배구감독, 전 배구선수
49세
출생
1969년, 경상남도 진주
신체
195cm, 102kg
가족
하혜민

경력사항

2011.05 ~ 2013.04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감독

2003 ~ 2011.05

동명고등학교 배구부 감독

2000 ~ 2002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코치

1992 ~ 2000

현대자동차 서비스 배구단 선수

1989 ~ 1997

배구 국가대표 선수

http://img.yonhapnews.co.kr/photo/yna/YH/2014/09/11/PYH2014091104070001300_P2.jpg


Last edited by 한준구 on 2017/04/12 6:48 am; edited 5 times
 제목 | Re: [응답하라-1991--당시 美男 스타 ^하종화( 하혜진-하혜민 선수-父親) 와 벌떼들--漢陽大 배구팀 vs. 경기대 배구팀] 및 女子배구의 ^+중흥 다시 오라]
 작성자 | 한준구 작성일  | 2017/04/12 6:54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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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추 40년전-영웅들-조혜정-유경화-유정혜-정순옥-이순복-이순옥-마금자-변경자-백명선-윤영래-장혜숙-박미금]--및 主공격수 박인실 제명^사건?] 및 160~70년대 韓國 배구 歷史!
 작성자|한준구작성일 |2016/05/21 11:29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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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철 스포츠 뒤집기]

@+신명철 스포츠 평론가는?

(고령으로 몇 년 전 돌아가신 최고의 스포츠 평론가-조동표 선생이후)

스포츠 평론가 기영노씨와 쌍벽을 이루는

권위있는 스포츠 평론가입니다-한준구 견해

女子 배구,

40년 前 그들은 정말 예뻤다

기사입력 2016.05.21 오후 12:32

▲ 활짝 웃고 있는 한국 여자 배구 대표팀 ⓒ FIV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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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전 승리 후 코트에서 승리의 V자를 그리며 기념사진을 찍은 여자 배구 대표팀의 모습.

한·일전 승리 후

코트에서 승리의 V자를 그리며

기념사진을 찍은 여자 배구 대표팀의 모습.

/FIVB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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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티비뉴스측 및 ^^신명철 편집국장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1976년 한국 스포츠는

2월 7일 열린 1975년도 대한체육회 정기 대의원 총회에서

김택수 회장이 다시 선출되면서 시작됐다.

김택수 회장은 바뀐 정관에 따라 4년 임기로

대한체육회를 이끌게 됐다.(지난 60여년간의 한국 스포츠에서 있어서

가장 뛰어난거물급 통큰 회장님으로

카리스마가 대단했던 기억이 납니다-한준구 촌평)

그 분은

1976년에 서울 집 한채 400만원 할 적에-2층 큰 양옥집 1500만원 할적에

금메달에 무려 1억원의 포상금을 내걸었고

해방이후 첫 금메달의 주인공이 된 레슬링의 영웅 *양정모선수가

위의 포상금을 받은 행운을 누린 바 있습니다-한준구 촌평)

그해 한국 스포츠의 최대 관심사는

7월 17일부터 8월 1일까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제 21회 하계 올림픽이었다.

4년 전 제20회 뮌헨 하계 대회에서

올림픽 무대에 처음 나선 북한에 뒤진 한국으로서는

북한과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지상 과제를 안고 있었다.

몬트리올 올림픽과 제 12회 인스부르크 동계 올림픽에 대비해

1975년과 1976년 상반기에 진행된

대한체육회 국가 대표 선수 강화 훈련 실적에 따르면

참여 선수는 198명, 임원은 27명,

훈련 일수는 426일에 이르렀다.

1976년에는 올림픽에서 입상한 전적이 있거나

입상 전망이 확실해 국위 선양이 기대되는 종목

그리고 지역 예선을 통과한 종목 등 소수 정예로 강훈련을 실시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구성된 대표 선수단은

임원 22명과 선수 50명으로 뮌헨 대회를 약간 웃도는 규모였다.

출전 종목은 남녀 배구.

레슬링과 유도, 복싱, 사격이었다

사격은 1978년 서울에서 열릴 예정인 세계선수권대회 개최국으로서

위상을 고려해

뮌헨 대회에 이어 또다시 참가하게 됐다.

남자 배구는 애초에는 ‘상위 입상이 어렵다’는 대한체육회의 판단에 따라

제외할 방침이었으나

지역 예선을 통과한 마당에 본선 출전을 가로막는 것은

지나친 처사가 아니냐”는

대한배구협회의 거센 반발에 밀려 선수단에 넣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사격과 복싱, 남자 배구를 뺀 종목에서 모두 메달 따

대한체육회의 선수단 구성 방침은 비교적 정확했던 것으로 판명 났다.

1970년대 한국 스포츠를 관통한

김택수 會長의 ‘선 체력 후 기술’ 방침은

시대 상황으로 봐 당위성이 있었다.

그러나 다소의 진통도 있었다.

몬트리올 올림픽을 불과 두 달여 앞둔 4월 25일

여자 배구 대표팀 주 공격수 박인실

선수촌에서 이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무렵 대한배구협회를 맡은 이낙선 회장은

올림픽 메달을 목표로 후원회를 조직하고 발전 기금을 마련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했다.

그리고 몬트리올 대회를 앞두고

1964년 도쿄 대회에서

일본 여자 배구를 올림픽 금메달로 이끈

다이마쓰 히로부미를 초빙해

김한수 감독, 전호관 코치와 함께 대표팀을 지도하도록 했다.

‘동양의 마녀’라는 신화를 만든 다이마쓰는

‘회전 리시브’ 등 혹독한 훈련의 대명사였다.

강훈련이 거듭되는 가운데 선수들의 반발이 있었고

결국 박인실무단으로 퇴촌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박인실

당시로는 174cm의 큰 키에

뛰어난 점프력과 강타를 지닌

한국 여자 배구의 간판 공격수였다.

이 사건은 당시 상당한 파문과 논란을 일으켰지만

결국 협회는 박인실을 제명했다.

올림픽에서도 여자 배구

동메달까지 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8개국이 출전한 가운데

조별 리그 B조에 속한 한국은

첫 경기에서 이 대회 준우승국인 소련과

접전을 펼친 끝에 1-3으로 졌다.

그러나 이후

쿠바와 동독을

풀세트 접전 끝에 각각 3-2로 물리치고 .

조 2위로 준결승전에 올랐다

한국은 조별 리그 A조 1위이자 대회 우승국인 일본에 0-3으로 졌으나

3위 결정전에서

헝가리에

3-1(12-15 15-12 15-10 15-6) 역전승을 거두고

동메달을 거머쥐었다.

한국 스포츠 사상 첫 여자 올림픽 메달리스트의 영예를 안은 선수는

신세대 스포츠 팬들에게도 이름이 꽤 알려져 있는

‘나는 작은 새’

조혜정 및

이순복,

유경화(당시 최고 인기 스타-별명-얼음공주),

유정혜,

정순옥,

마금자,

장혜숙,

이순옥,

박미금,

변경자,

백명선,

윤영내 등 12명이다.

이들 가운데

유경화와 유정혜는 공격력이 있는 세터여서

‘더블 세터’를 이뤄 주 공격수인 조혜정(1m64cm)과 함께

메달 획득에 크게 이바지했다.

40년 전 그들은 정말 예뻤다.

그리고 21일,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여자 배구 세계 예선을 통과한

김연경을 비롯한 12명의 선수들은

40년 전 선배들보다 조금 더 예쁘다.

오는 8월, 한국 여자 배구는 다시 한번 올림픽 메달에 도전한다.

4년 전 런던 올림픽 동메달 결정전에서

일본에 0-3(22-25 24-26 21-25)으로 져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던

대회 MVP 김연경을 비롯한

12명의 한국 선수들에게

하늘은 다시 한번 기회를 줬다.

홈 코트의 일본이 4년 전과 비슷하게 ‘장난질’을 쳤지만.

[여자 배구의 올림픽 출전을 계기로 ‘신명철의 스포츠 뒤집기’는 오는 30일부터 배구 발전사를 다룰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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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철스포츠 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史-배구(3)

기사입력 2016.06.06 오전 09:41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차지한 여자 배구 선수들.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나는 작은 새’조혜정이다.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측 및 ^^

신명철 편집국장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1964년 도쿄 올림픽 한국 선수단 가운데

가장 다급하게 경기에 나선 종목이 여자 배구였다.

지역 예선에서 아시아 대표로 뽑힌 북한이

느닷없이 철수하자

FIVB(국제배구연맹)가

지역 예선에서 2위를 한 한국에 출전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배구는 개최국 일본의 전략 종목이었다.

일본은 실제로 이 대회 배구 여자부에서 금메달,

남자부에서 동메달을 손에 넣었다.

여자 배구는 북한의 불참으로 출전국이 5개국으로 줄면서

정식 종목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위기에 놓였다.

한국은 FIVB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미 해체된 대표팀을 급히 다시 소집해 출전했으나

일본 소련 폴란드 등에 힘 한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꼴찌에 그쳤다.

그러나 여자 배구는 이후 기량을 갈고닦아

1976년 몬트리올 대회에서 동메달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룬다.

1963년 12월 뉴델리에서 열린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북한과 총성 없는 전쟁을 한 끝에 3-2로 이기는 등 6전 전승을 거두며

본선에 오른 한국 남자 배구는

세계 수준과 실력 차를 절감하며 9전 전패로 꼴찌에 머물렀다.

다만 헝가리, 루마니아, 미국 등과 경기에서는

풀세트 접전을 펼치며 성장 가능성을 확인했다.<2편에서 계속>

배구가 처음으로 정식 종목으로 열린

1964년 도쿄 올림픽(6위·꼴찌) 이후

한국 여자대표팀은?

대회마다 순위가 한 계단씩 올라가는 등 발전을 거듭했다.

1968년 멕시코시티 대회 5위,

1972년 뮌헨 대회 4위에 이어

1976년 몬트리올 대회에서 올림픽 출전 사상 처음으로

단체 구기 종목 메달(동)을 딴다.

도쿄 올림픽이 끝나고 2년 뒤

방콕에서 열린 제 5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배구는 남녀 모두 일본에 져 은메달에 그쳤다.

그냥 진 게 아니고 0-3 완패였다.

세트스코어는 남자는 7-15, 5-15, 5-15였고

여자는 11-15, 3-15, 6-15였다.

수준 차가 매우 컸다.

그럴 만도 했다.

일본 남,녀 대표팀은?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여자부 금메달과 남자부 동메달에 이어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도

남자부 은메달, 여자부 은메달을 차지한

그 무렵 세계 정상권의 배구 강국이었다.

일본여자의 경우 남자보다 더 전력이 강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1960년(브라질) 대회 준우승,

1962년 대회(소련) 우승,

1967년 대회(일본) 우승 등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韓國은

1967년 세계여자배구선수권대회에서 3위를 했지만

이 대회에는 배구가 강한 소련 등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불참했다.

이 대회는 이듬해 멕시코시티에서 열릴 올림픽 예선을 겸하고 있었다.

한국 여자 배구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4강 안에 든 건

이 대회에 이어

1974년 대회(멕시코) 3위,

1978년 대회(소련) 4위,

1994년 대회(브라질) 4위 등

4차례로

1978년 대회(이탈리아)에서

딱 한 차례 4강에 오른 남자보다 훨씬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한국여자 배구는

1967년 세계선수권대회 3위 자격으로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 출전했다.

개막식 다음날 벌어진 첫 경기에서

폴란드와 맞서 1, 2세트를 15-10, 15-12로 따 낸 뒤 3, 4세트를 10-15, 12-15로 내줘 승부를 마지막 세트로 넘겼다.

5세트 들어 최선을 다했으나 듀스 끝에 15-17로 아깝게 졌다.

이후 페루와 소련에 0-3으로 졌으나

미국과 멕시코를 3-1, 3-0으로 잡는 등 선전했다.

당시 세계 수준의 경기력을 자랑하고 있던 일본에

0-3(5-15 5-15 4-15)으로 힘없이 물러났으나

마지막 경기에서 불꽃 투혼을 발휘해

체코슬로바키아를 3-1로 따돌리고

최종 전적 3승4패로 애초 목표치인 5위를 차지했다.

첫 경기에서 폴란드를 잡았다면 1976년 몬트리올 대회가 아닌, 이 대회에서 단체 구기 종목 올림픽 첫 메달의 꿈을 이룰 수도 있었다.

8개국이 출전한 여자 배구 최종 순위는 1위 소련, 2위 일본, 3위 폴란드였다.

1970년 방콕에서 두 번째로 열린

제 6회 아시아경기대회는

여자 배구가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된

의미 있는 대회였다.

남녀 모두 또다시 일본의 벽을 넘지 못하며

풀리그로 진행된 경기에서

각각 6승1패를 기록하며 은메달에 만족했다.

남자는 일본에 0-3(6-15 4-15 5-15)으로 완패했으나

김영자와 조혜정, 이순복, 윤영내 등

노장과 신예가 조화를 이룬 여자는

일본에 1-3(4-15 12-15 15-13 9-15)으로 따라붙으며

성장 가능성을 보였다. <4편에 계속>

 제목 | Re: [응답하라-1991--당시 美男 스타 ^+하종화(지금 하혜진선수 및 하혜민 선수의 父親) 와 벌떼들--漢陽大 배구팀 vs. 경기대 배구팀]
 작성자 | 한준구 작성일  | 2017/04/12 6:28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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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은퇴선수--ㄱ.조혜정 ㄴ.박미희 ㄷ.지경희 ㄹ.장윤희 --여자배구 시대별 아이콘의 과거 맹활약--독사 김철용 감독을 통해 다시 살펴보기]
 작성자|한준구작성일 |2016/08/03 2:39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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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제목과 관련한 다음 글을 읽어보시길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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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한국 女子 배구

시대별 아이콘을 말하다

기사입력 2016.08.03 오전 06:02

지난 5월 일본 도쿄에서 들려온 소식은 온 국민을 기쁘게 하기에 충분했다.

여자국가대표팀이 2016 리우 올림픽 본선 행 티켓을 거머쥔 것이다.

지난 2012 런던 올림픽에 이어 2회 연속 진출에 성공한 태극 낭자들 활약에

전 국민이 열광했다.

여자배구는 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동메달의 신화를 썼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지금,

‘구기종목 첫 메달’이라는 영광을 재현해주기를 열망해 왔고

드디어 그 힘을 보여줄 기회가 눈앞에 찾아왔다.

국민들에게 기쁨을 주면서 한국여자의 강한 모습을 면면히 보여준 여자배구.

과거에서 현재까지, 여자배구를 대표하는 ‘아이콘’은 누구일까.

1976년부터 2016년까지 시계를 돌려봤다.

각 선수들에 대한 기억

김철용 前 여자국가대표 감독(현 중앙여고 감독)에게

직접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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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혜 정
1953년생 165cm 레프트 미도파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따냈던 1976년, 그 당시 대표팀 주축으로 활약했던 이가 바로 조혜정이다. 신장은 165cm로 작은 키였지만 그 열세를 충분히 만회할 점프력으로 ‘나는 작은 새’라는 애칭을 얻었다.

배구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것은 1964년 도쿄올림픽부터이다. 일본 여자배구는 도쿄올림픽 금, 1968 멕시코올림픽 은, 1972 뮌헨올림픽 은, 1976 몬트리올올림픽 금 등 10여년간 세계최강으로 군림했다. 한국배구도 일본을 따라 조직력과 끈질긴 수비를 앞세워 메달을 노려왔다.

기회는 몬트리올올림픽. 조혜정, 유경화, 정순옥, 윤영내, 변경자, 유정혜, 백명선 등이 주축을 이룬 한국 여자 팀은 서구 선수들보다는 평균 신장이 10센티 가까이 작았다.

8개국이 출전한 가운데 B조에 속한 한국은 첫 경기에서 이 대회 준우승 소련과 접전을 펼친 끝에 1-3으로 졌다. 이어 동독과 쿠바를 잇따라 풀세트 접전 끝에 가까스로 물리치고 조 2위로 준결승전에 올랐다.

한국은 A조 1위이자 대회 우승국인 일본에 0-3으로 졌으나 3위 결정전에서 헝가리에 3-1(12-15, 15-12, 15-10, 15-6) 역전승을 거두고 감격적인 동메달을 거머쥐었다.

단신 주 공격수 조혜정은 높은 상대 블로킹을 뚫고 자유자재로 스파이크를 날렸다. 그러나 조혜정은 쿠바와 경기에서 무릎을 심하게 다친다. 조혜정은 의사 만류를 뿌리치고 준결승 일본전에 나섰으나 눈물로 교체되었다. 헝가리와 벌인 3위 결정전에서는 백명선이 맹활약하며 동메달을 따냈다. 당시 조혜정의 활약을 외신기자는 “Flying Little Bird”라고 표현했다.

부산 봉래초등학교 6학년이던 때 배구공을 처음 잡은 조혜정은 이후 부산여중, 숭의여고, 국세청, 대농을 거쳤으며, 1977년 은퇴 이후 이탈리아 라이온스 베이비에서 코치 겸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후 현대건설과 송원여고 등에서 지도자 생활을 거쳐 2010년 GS칼텍스 감독으로 선임되며 프로배구 역사상 최초의 여자 감독으로 기록됐다.

“점프가 특이했던 선수” By 김철용 감독
키가 작았어요. 매스컴에서도 별명을 ‘나는 작은 새’라고 했죠. 조혜정 선수는 점프가 특이했어요. 보통 뒤꿈치가 먼저 바닥에 닿으면서 앞꿈치로 점프하는데 조혜정은 뒤꿈치를 대지 않고 앞꿈치로만 점프를 해요. 점프가 선천적으로 좋기도 했는데 모래주머니를 찬다든지 점프연습을 유독 많이 했던 선수로 기억이 돼요. 키가 작아도 점프가 좋아서 동유럽 선수들하고 경기할 때 모습은 상당히 인상 깊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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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미 희
1963년생 174cm 센터 & 라이트 미도파

1980년대 한국 여자배구 전성기를 이끌었던 주인공. 광주여상 3학년이던 1982년 국가대표로 발탁된 뒤 1983년 미도파에 입단했다. 1985년 대통령배 우승을 시작으로 ‘최강 미도파’ 시대를 이끌었다.

조혜정이 미도파 1세대라면 미도파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선수는 박미희였다.

선수 시절 ‘코트의 여우’라고 불릴 만큼 재치 있는 플레이를 선보였던 그녀다.

당시 라이벌이던 현대건설 전호관 감독은 “상대 코트를 흔들어 놓는 재주가 탁월한 선수”였다고 평가했다.

박미희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과 1988년 서울올림픽에 출전했다.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무릎 부상을 당하며 심한 부침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올림픽에서 수비상을 수상했다.

수비상은 당시 올림픽 여자배구에서 한국선수가 최초로 받은 개인상. 이후 개인상은 24년 후인 2012 런던올림픽에서 김연경이 득점왕을 수상한 게 유일하다.

1979년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우승을 비롯해 1984년 LA올림픽,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 출전,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은메달 등 화려한 이력을 남기고 은퇴한 박미희는 해설위원으로도 활약했다. 지금은 흥국생명 감독으로서 팀을 이끌고 있다.

“영리한 배구를 했던 선수” By 김철용 감독
박미희 감독 같은 경우는 센터, 라이트쪽 공격이 가능했던 선수였죠. 포지션상 오픈 공격보다는 시간차 공격에 능했던 선수입니다. 그리고 코트의 여우라는 별명이 있지 않습니까. 그만큼 재치 있게 배구를 했던 선수로 기억이 돼요. 배구경기는 흐름이 승패를 크게 좌우합니다. 그 흐름에 리듬을 타야 하는데 그 꾀는 대적할 선수가 없었죠. 배구 스타일을 보면 힘보다는 타이밍을 잘 살리는 선수가 아니었나 싶어요. 인상에 남습니다. 박미희 감독은 정말 영리한 배구를 했던 선수라고 이야기를 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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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경 희
1967년생 177cm 레프트 현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여자 실업배구를 주름잡았던 스타. 현대 여자배구팀 전성기를 이끌었던 레전드급 선수. 여자배구 최고 스파이커로 손꼽힌다. 이와 함께 수비도 능한 전천후 선수였다.

1986년 대통령배 대회에서 신인상을 받았던 지경희는 이후 꾸준히 ‘베스트 6’에 이름을 올렸다. 뿐만 아니라 1993년에 열린 홍콩 월드그랑프리 국제여자배구대회에서 ‘베스트 6’로 뽑히기도 했다. 1995년 3월 현역에서 은퇴했지만 소속팀이던 현대건설 권유로 트레이너 겸 선수로 활약하다가 96년 초 다시 코트를 떠났다. 이후 비치발리볼 국가대표로 얼굴을 비추기도 했다.

“힘 배구를 구사했던 선수” By 김철용 감독
지경희 선수는 테크닉보다는 힘의 배구를 구사한 선수예요. 그 당시는 그런 공격이 잘 통했죠. 제가 93년도 대표팀 감독을 할 때 같이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에피소드가 있다면 지경희 선수가 자기가 팀에서 가장 체력이 좋은 선수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대표팀에서 5분 런닝훈련을 실시했습니다. 기대보다 많이 처지더라고요. 자기 팀에서는 자기가 제일 체력이 좋다고 했는데(웃음). 물론 팀마다 스타일이 달랐겠죠. 제가 지켜 본 지경희는 상당히 힘을 실어 묵직한 볼을 때렸던 선수로 기억이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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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윤 희
1970년생 170cm 레프트 호남정유

국가대표 레프트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장윤희. 배구선수로서는 작은 키였지만 파워풀한 공격과 점프력은 그녀를 대한민국 최고 공격수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그가 속했던 호남정유는 프로배구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슈퍼리그에서 1991년부터 1999년까지 무려 9년 연속 우승 기록을 세웠다. 그 기간 92연승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89년 처음으로 성인 대표팀에 합류한 장윤희는 빠른 발과 독보적인 점프력을 앞세워 ‘장윤희 시대’를 열었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는 여자배구가 금메달을 획득하는 데 혁혁한 활약을 펼쳤다. 장윤희는 공격뿐만 아니라 수비에도 일가견이 있던 선수. 그가 장기간 부동의 국가대표 레프트로 뛸 수 있었던 이유기도 하다. 은퇴 이후 9년만인 41살이라는 나이에 2010~2011시즌 V-리그에 컴백하기도 했다.

작은 선수의 모든 역량을 발휘한 선수” By 김철용 감독
제가 일신여상 교사로 있을 때 장윤희 선수는 근영여고 선수였어요. 결승에서 주로 만났죠. 장윤희 선수는 점프가 반 박자가 빨랐어요. 볼을 때리는 순간이 정말 좋은 선수였어요. 볼에서 짱 하는 소리가 날 정도였죠.

고등학교 시절 장윤희는 첫 스파이크 볼이 성공하면 그 후는 아무도 막을 수가 없어요. 반대로 첫 볼이 차단되면 그날은 죽 쑤는 날이었고요(웃음). 제가 87년 8월에 호남정유에 감독으로 부임했는데 당시 장윤희가 키가 작다며 다른 팀에서 거들떠 보지도 않았어요. 제가 장윤희를 잡았지요. 3단 줄넘기를 다른 선수들이 2단 뛰듯이 뛰었어요. 60~70개 정도로요. 정말 근력이 좋았어요. 탄력이 좋았죠. 키 작은 선수치고는 볼을 다루는 재치는 정말 타고났어요. 순발력도 좋아서 수비 폭도 넓었죠. 어지간한 페인트 공격은 안 먹었으니까요. 그러니까 대표선수를 10년씩 했죠.

인상 깊은 건 승부욕이 강했어요. 지금 그런 정신력을 가진 선수를 찾아보기가 힘들어요. 키 작은 선수로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역량을 충분히 발휘한 선수가 아니었나 싶어요. 장윤희는 한마디로 승부욕으로 똘똘 뭉쳐서 테크닉과 파이팅으로 코트를 장악했던 선수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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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연 경
1988년생 192cm 레프트 터키 페네르바체

명실상부 현 대한민국 최고의 공격수. 아니, 세계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히는 선수가 바로 김연경이다. 그러나 어렸을 때 사정은 지금과 같은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 원곡중학교 3학년 때까지 키가 170cm도 되지 않아 중학 시절 내내 교체 멤버로 전전하며, 세터나 리베로로 경기에 출전하였다.

그러나 고등학교 진학 이후 키가 20cm 이상 자라며 레프트 공격수로 포지션을 바꿨고 이 때부터 “초고교급 선수”로 불리며 2005년 10월에 열린 드래프트에서는 전체 1순위로 흥국생명에 입단했다. 최하위 팀이었던 흥국생명은 김연경 맹활약으로 프로화 이후 처음으로 통합우승을 거둔다. 김연경은 프로 데뷔 첫 해에 정규리그 MVP와 챔피언 결정전 MVP를 비롯하여 신인상, 득점상, 공격상, 서브상 등을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V-리그를 점령한 그녀는 해외로 눈을 돌렸고 일본을 거쳐 터키리그에 진출했다. 2011년 터키리그로 진출해 5시즌을 소화한 김연경은 그 기간 동안 이룰 수 있는 것은 다 누렸다. 유럽배구연맹(CEV) 챔피언스리그와 터키리그 우승은 물론 각 대회 MVP까지 휩쓸었다. 지난 시즌을 끝으로 FA 신분을 얻은 김연경은 장고 끝에 페네르바체 잔류를 선택했다.

김연경은 여자국가대표팀 에이스이자 주장으로서 한국팀을 2016 리우 올림픽 본선무대로 이끌었다. 그는 최종예선에서 베스트 레프트로 꼽히며 세계 최고 공격수임을 새삼 입증했다. 지난 2012 런던올림픽 당시 우리나라는 4위를 기록하며 아쉬움을 삼켜야 했지만 김연경은 MVP를 수상하며 한국배구의 자존심을 세웠다. 한국여자가 리우올림픽에 큰 기대를 거는 것은 그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배구선수로서의 조건을 다 갖춘 선수” By 김철용 감독
김연경 선수는 제가 흥국생명에 몸 담고 있을 때 같이 있었어요. 36년 만에 우승했을 당시 김연경 선수는 1년차였죠. 기질이 있는 선수예요. 중학교 때 키가 168cm밖에 안됐으니까 세터, 리베로를 전전했죠. 그런 경험들, 서러움 등이 큰 선수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아마 처음부터 키가 컸다면 그런 애로사항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요.

제가 데리고 있었을 때 보면 코트 안에서 집중력이 좋고 승부욕이 있어요. 지기 싫어했죠. 배구선수가 갖춰야 할 부분에는 물론 경기력도 있겠지만 체력, 정신력, 인화력 이런 부분들이 있는데 그런 면에서 팀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잘하는 선수였어요. 뭐랄까, 분위기를 볼 줄 알았어요. 만약 지도자가 “딱 10번만 하자”하면 10개를 놓치지 않았죠. 한 개도 놓치지 않았고 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그 정도로 센스가 있고 승부욕이 있죠.

운동선수로서 갖춰야 할 부분들은 다 갖추고 있어요. 제가 해설을 하고 있었을 때 아무래도 얘기를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살며시 다가와서 손을 잡아주고 간 적이 있어요. 따뜻한 면도 있고 예절을 잘 차리는 선수예요. 지금은 세계적인 선수가 됐지만 어렸을 때 다양한 포지션을 경험했던 것이 큰 장점으로 꼽힙니다.

글/

정고은 기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사진/ KOVO 제공, 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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